신이 주셨고, 신이 거두어갔다.
할머니는 구덩이 옆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신은 주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이뿐 아니라 아이가 자라서 될 미래의 모습까지도 전부 저 아래에, 땅속에 묻혀 있다. 흙 세 줌 그리고 등에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는 어린 여자아이가 땅속에 묻혀 있다. 아이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책가방은 계속 아래위로 춤을 추며 흔들린다.
9쪽
항상 그녀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일은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누구와도 함께 넘지 못했던 경계를 넘어, 세계를 등 뒤에 두고,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둘이서 나누는 행위라고. 그런데 이제는 그 경계가 변할 수 있으며,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경계의 위치가 옮겨진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경계는 그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남편을 다시 그녀에게서 떼어놓았다. 이전에는 그녀가 남편의 자유였는데, 지금 그는 바깥세상에서 자유를 찾고 있다.
36쪽
상황이 달랐더라면 한 가족으로 남았거나, 가족이 될 수도 있었을 것들이, 지금은 어찌나 갈가리 찢겨버렸는지, 사람을 말에 묶어놓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처형쯤은 그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는, 그리고 다른 여자는, 이곳, 저곳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생각하곤 한다. 아기가 갑자기 숨을 멈추어버린 그 순간을.
71쪽
하나의 삶에는 매번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전선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그 모든 전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110쪽
새빨개, 새빨개, 새빨개, 딩, 딩, 딩, 바링이 불탄다, 오타크링이 불탄다, 냄새 좋은 훈제 청어로구나!
129쪽
경계를 없애기, 그녀는 오직 그것만을 원했다. 그녀가 친구를 사랑했고 친구의 애인도 사랑했다는 것이 도대체 왜 불가능한가? 거기서 무엇이 그녀에게 허용되지 않았고, 누가 허용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그녀는 강물에 뛰어들 듯이 사랑으로 뛰어들면 안 되고, 그녀가 헤엄칠 수 없는 강물에서, 왜 다른 누구도 헤엄치지 않는단 말인가? 왜 어머니는 그녀를 창녀라고 불렀는가? 할머니가 유대인이란 말을 왜 아무에게도 하면 안 되는가? 세상에는 사랑이 너무나 부족해, 서로를 아교로 붙이지도 못할 정도였단 말인가? 차이는 왜 있으며, 차별은
왜 있는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세상의 일들이 산산이 무너져 내렸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이, 그녀 자신을 세상에서 추출해낼 최적의 순간이었다.
129쪽
한 남자가 낡은 한 조각 천으로 겉옷을 만드네.
겉옷이 해어지자, 그것으로 조끼를 만드네.
조끼가 해어지자, 그것으로 수건을 만드네.
수건이 해어지자, 그것으로 모자를 만드네.
모자가 해어지자, 그것으로 단추를 만드네.
단추로는, 아무것도를 만드네.
마침내 마지막으로, 아무것도로 그는, 이 노래를 만드네.
133쪽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녀는 전쟁이 아버지를 죽인 거라고 확신했다. 비록 전선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는 극심한 재앙의 한가운데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수년 동안이나 안간힘을 쓰다가 마침내 존재가 완전히 고갈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73쪽
새벽 4시, 해뜨기 직전 엘리베이터가 그녀의 층에 멈추지만, 책상에 앉은 채로 종이 뭉치 위에 얼굴을 대고 잠들어버린 그녀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비밀경찰들이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이마는 ‘경계’라는 글자 위에 놓여 있다. 오래전에 꾸려서 문 옆에 세워둔 검푸른색 작은 가방은 잊고 만다. 집 안에 다시 고요가 찾아들고, 가방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다.
204쪽
일생 동안 그녀는, 그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른 채,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마지막으로 무엇
인가를 했다. 그러니까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친 전선인 걸까?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단지 이 세상 밖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세상 밖으로 추락하는 것일까?
241쪽
어떤 죽음이든지 죽음은 죽음이다.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는다는 차이뿐. 어떤 입구든지 입구는 입구다. 모든 이에게, 모든, 모든 사람에게,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입구는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명부에는 단지 구멍뿐인가? 그 밖의 다른 것은 전혀 없단 말인가? 여기서는 다른 바람이 분다. 한 인간이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게, 여기 또는 저기서, 구멍의 한가운데를 향해 발을 헛디디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추락하거나 침몰할 때 붙잡아줄 것이 전혀 없단 말인가?
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