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애잔하게 스며든 지난날의 기억과 함께 만남과 이별, 변화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해 나가는 인물들
그들이 펼쳐내는 몽글몽글하고도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5편의 이야기
주얼의 두 번째 작품집 『여름의 한가운데』에 수록된 다섯 편은 내용 면에서 서로 연관이 없는 독립된 이야기다. 하지만 각 소설이 담고 있는 분위기와 이미지는 유사한데, 그건 바로 방황과 그리움, 그리고 안타까움과 쓸쓸함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모두 과거의 어느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그 속에 그저 가만히 머물러 있기도 하고, 또는 어떻게든 벗어나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향하기도 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과 선택의 순간마다 인물들의 방황과 그리움은 반복된다. 작품집의 제목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여름’은 단순히 한 계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건 생기 가득하면서도 싱그러운, 동시에 따가운 햇살과 무거운 공기에 끝없이 지치기도 하는 인생의 어느 한순간이다. 그러한 ‘여름’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해 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아련한 반가움을, 때론 저릿한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결국 공감과 위로로 다가갈 수 있는 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분명 자신만의 그 어떤 ‘여름’의 순간을 가만히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표제작 「여름의 한가운데」 속 두 인물, ‘주연’과 ‘나’는 서로 친구로 지낸 지 20년이 된 대학교 동기이자 스무 살 무렵 서로에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가지기도 했던 사이다. 어느 여름밤 태풍이 상륙한 동해안의 해변에서 ‘나’는 ‘주연’에게 수줍은 고백을 하고, 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서투르고 부끄러웠던 고백 이후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이미 그때의 감정이 사라졌다고 믿으려 하지만, 어쩌면 지금도 그 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만도 같아 스스로 자신이 없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마흔 살이 된 ‘주연’과 ‘나’는 빠르게만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 부단하게 각자의 나아갈 방향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가며 무더운 여름을 통과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마음속 기억의 조각 일부는 아련하게 남아있는 어느 오래된 여름의 풍경에 아직 머무르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이 스무 살이었던 그때, 불어오는 눅진한 바람에 비 냄새가 가득했던 그 여름의 바닷가’(38쪽)에.
「멋진 하루」의 주인공은 대학교 선배의 결혼식에서 만날게 뻔한 예전 남자친구가 신경 쓰이기만 한다.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없고 나와 상관도 없는 지나버린 옛 기억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그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괜히 부족하고 처량해 보일까 싶어 걱정되기만 한다. 결국 외모에 잔뜩 신경을 쓰고 긴장한 채 참석한 결혼식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도망치듯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주인공은 4월의 완벽한 날씨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동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 작품집에 수록된 다섯 편의 소설 속 여러 인물 중 가장 유머러스하고 귀엽기까지 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과거에 얽매여 있기보단 자연스럽게 변하며 현재를 살아가기를, 그리고 자신을 조금 더 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파주 가는 길」은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10년 넘게 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직접 운전해서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서 그토록 두렵게만 느끼던 운전을 시작하게 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가고자 하는 곳은 바로 1년 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엄마가 안치되어있는 추모공원이다. 지난한 연습을 마치고 드디어 긴장 가득한 마음으로 추모공원까지 운전하는 동안 그녀는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엄마를 그리워한다. 생전에 자신이 운전하는 차로 모시고 함께 다니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어떠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다시는 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안타까워한다. 마침내 무사히 도착한 추모공원에서 그녀는 엄마의 납골함을 마주하며 앞으로 자신이 직접 운전해서 자주 만나러 올 거라고, 그래서 기억 속 엄마의 모습이 흐려지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뭉클함이 전해지는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슬픔을 마주하기 위한 작지만 단단한 마음과 행동을 보여준다.
아마도 「수면 아래에서」는 작품집에 수록된 다섯 편 중 독자들에게 가장 먹먹하고도 쓸쓸한 감정으로 기억될 작품일 것이다. 주인공 ‘수겸’과 그의 학교 선후배인 ‘민호’와 ‘은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뉘어 펼쳐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들의 이십 대 시절을 배경으로 ‘수겸’을 향한 ‘은정’의 애틋한 마음과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수겸’의 안타까움을 그리고 있다. ‘수겸’을 향한 자신의 마음 때문에 힘들어하는 ‘은정’은 수영을 하며 그러한 마음을 정리해보려 한다고 ‘수겸’에게 말한다. “난 그 순간이 좋아요. 세상과 분리되어 물속에서 이런저런 잡생각 없이 오로지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시간이.”(121쪽) ‘은정’에게는 수면 아래에서 부드럽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호흡 소리만을 듣고 평안만을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이 가장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다. ‘수겸’은 현재의 삶에 권태를 느끼며 다가오는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민호’를 만나게 된다.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며 옛 추억을 나누던 중 ‘수겸’은 ‘민호’로부터 ‘은정’에 관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민호’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침잠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민호’와의 만남 뒤 ‘수겸’은 궁금해 한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디쯤에 있는 건지. 그리고 자신은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 답을 알 수 없는 그 물음에 ‘수겸’은 그저 조용히 눈을 감을 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월간 윤종신」은 2013년 1월에 둘 다 만 서른 살을 맞이한 ‘나’와 ‘그녀’가 소개를 통해 만나 연애를 시작한 뒤 다시 겨울이 시작되기 전 이별하는 이야기이다.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따라가며 펼쳐지는 그들의 만남과 설렘, 사랑과 갈등, 그리고 헤어짐의 순간에는 매달 꾸준히 발표되는 윤종신의 노래가 흐른다. 이 소설은 작가가 이번 작품집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건 바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무언가는 변하지만 무언가는 여전히 꾸준하다는 것이고, 모든 게 변한다고는 하지만 부디 기억 속 어떤 풍경만은 변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나에게 그녀와 함께 머물렀던 1월부터 10월까지의 모든 풍경이 윤종신의 노래와 함께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듯이, 그녀도 윤종신이 담담하게 들려주는 우리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간이 흘러 모든 게 변하지만, 부디 그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기를 작게나마 희망해 본다.”(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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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것과 변하는 것. 머무르는 것과 나아가는 것. 서로 조화롭다면 가장 좋겠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둘 사이를 방황했고 보통은 모두 실패하곤 했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방황할 것이고, 어쩌면 계속해서 둘 다 실패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방황과 실패의 기억이 내 소설의 출발점이 되어준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방황하고 실패할 것이다. 나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방황과 실패이다._「작가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