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누구도 전시회를 사고파는 거래 대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경쟁사 전시회가 좋아 보이면 코엑스나 킨텍스에 제안해서 유사 전시회를 만들면 그만이라는 게 전시업계의 상식이었다. 전시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은 우리 회사를 ‘호구’라고 놀렸다. 살 필요가 없는 전시회를 거액의 돈을 주고 매수했기 때문이었다. ‘바보’라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이쪽 바닥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저렇게 당한다며 혀를 찼다. 술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벤처사업으로 돈을 벌더니 돈지랄을 한다’는 이야기를 우리 회사 임원에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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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사업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우리들은 브랜드 파워에 집중했다. 전시회의 성공여부는 ‘브랜드 파워’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전시회, 브랜드가 널리 알려져 있는 전시회는 대중매체 홍보만으로도 관람객을 손쉽게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참가업체를 모집하는 영업은 브랜드 파워의 부산물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명백한 오류였다. 우리들은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며 조금씩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가 건설경기 붕괴로 이어지자 브랜드 파워에 의존하는 기존 방식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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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까지 엔터프라이즈는 미국 목화 생산의 중심지였다. 이곳 사람들은 목화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다. 목화 덕분에 이들은 윤택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95년, 평화롭던 이곳에 청천벽력 같은 재난이 발생한다. 난데없이 ‘목화 바구미’라는 해충이 창궐해 더 이상 목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엔터프라이즈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대체농작물을 찾아 나섰다. 이렇게 해서 재배를 시작한 것이 바로 ‘땅콩’. 주민들은 목화 대신 땅콩을 심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 지역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몇 년 후 이곳은 세계적인 땅콩 생산지가 되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계속 목화 농사를 지었다면 우리는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10여 년 전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조원표 사장은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목화 벌레 덕분에 땅콩을 찾은 엔터프라이즈 사람들 이야기를 직원들에게 소개했다. ‘우리도 땅콩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땅콩은 무엇일까?’
--- p.158~159
우리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한편 참가를 결정한 회사 관계자들에게 ‘관람객은 많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계속 심어 주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앞이 캄캄했다. 전시회 참가기업과 쌓아 온 신뢰와 관람객 모집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자체가 끔찍한 공포로 엄습했다. … 전시회를 2주 남겨 놓은 시점까지 사전등록자는 거의 없었다. 보통 이 시기가 되면 사전등록자가 2만 명은 넘어야 했다. 물론 사전등록을 하지 않고 당일 현장에서 등록하며 참가하는 관람객도 절반 정도는 되지만, 사전등록자가 적다는 것은 곧 현장등록도 적다는 징후였기에 땅이 꺼질 듯한 우리들의 한숨 소리가 자꾸만 커져 갔다.
--- p.207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반드시 잡고 싶은 기회, 베팅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이때도 우리들은 ‘대출과 투자는 회사 순자산의 30%에서 50% 이내에서’라는 원칙을 지킨다. 이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면 부득이 투자를 늦춘다. 천천히 성장하더라도 러시안 룰렛처럼 목숨을 거는 도박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 회사는 자산을 답답하리만치 보수적으로 운영한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는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한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자산운용과 어떤 개울이든 반드시 뛰어넘으려 시도하는 도전 본능. 우리 회사의 이율배반적인 이 두 가지 DNA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 p.227
우리들이 민간은 할 수 없는 사업, 공공기관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시장이라는 전시장 사업에 도전장을 던졌다. 단 한 번도 민간이 시도하지 않은 사업, 누구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전시장 운영사업에 메쎄이상이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전시업계에 또 한 번 파란을 일으켰다. 2020년 7월, 우리 회사는 ‘수원메쎄’라는 전시장을 건립했다. 전시장 내부 크기는 9,080㎡, 위치는 우리나라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고 알려진 수원역 근처이다. 우리가 전시장을 건립하겠다고 하자 대부분은 “미쳤다”, “의욕이 앞선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된다는 얘기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메쎄이상이 망할 때가 됐다고 농을 쳤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하니 ‘외인구단 DNA’를 가진 우리에겐 더욱 매력적으로보였다. ‘남이 할 수 없다면 내가 하겠다, 다들 힘들다고 하지만 우리가 잘하면 대박을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p.25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