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0
흥미로운 사실은 태아가 엄마의 자궁벽을 짚고 버티면서 지문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키이스들의 지문은 매끈하다. 비닐로 된 자궁벽은 힘을 받쳐주지 못해 계속 밀려난다.
p.21
“20년간 돌보던 키이스가 선택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해줘요.” 내가 요청한다.
“안도감.” 완다가 말한다. 일단 돌보던 키이스가 없어지면, 그를 위해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와 교환할 필요 없는 카테터가 떠오른다. “당혹감.” 완다가 덧붙인다. (중략)
남편이 사망했을 때 나는 어떤 느낌이었던가?
“심부름을 하느라 오븐 끄는 걸 잊어버린 기분이었어.”
나는 과열된 오븐이 도시의 한 블록을 다 태웠을 거라고 확신한다.
p.49
“나는 인터넷 포르노의 시대에 요즘 어떤 사람들이 폭섹스 전화방에 전화를 거는지 궁금했어요.” 월터가 말했다. “이용객이 컴퓨터 사용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할아버지들뿐일까요?” (중략)
“우리가 저 단계에 이르게 되면 우리 세대는 어떨 것 같아요? 음란한 남자 노인들이 여자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색정증 간호사처럼 굴어달라고 부탁하는 대신에 고화질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할까요? 이건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해요.”
p.68
일부 개두술은 환자가 이식이 있어야 한다. 종양 때문에 감정을 관장하며 언어나 운동 기능을 조절하는 두뇌피질의 불길 앞에 귀중한 책과 담요를 가까이 가져가는 셈이 된 경우, 인터넷 뱅킹 보안과 관련된 질문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질문을 즉석에서 환자에게 던진다.
p.72
뇌와 뇌의 질병을 다루는 것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단순히 좋은 기술자만 있으면 된다. 어려운 것은 정신을 다뤄야 한다는 점이다.
p.86
여기 적힌 답변을 다시 한 번, 그러나 아주 천천히 읽어보세요.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십시오. “나는 살아 있다.”
p.122
인생을 꾸미는 방법엔 한 가지 청사진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격과 가족 또한 건축입니다.
p.123
헬렌과 처음 면담을 한 뒤 나는 괴로운 꿈을 꾸었다... 한 여성이 고통스러운 신체변형을 겪었다. 힘줄이 당겨지고 처형대에 묶여 뼈가 늘어졌으며 관절이 너덜거렸다.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탑처럼 버티고 섰다. 나는 림프, 헤모글로빈, 신경, 호르몬과 함께 높은 곳으로 순환하는 혈관과 박동을 조사하느라 근육질로 된 복도를 헤매다녔다. 그것은 괴기스러운 건축, 괴물을 위한 건축이었으며, 결코 충분하다고 생각된 적 없는 거주자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그가 시도한 것이었다.
p.130
매디가 도착하고 며칠 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주신 마지막 저축으로 세계 일주를 하고 있다고 매디에게 큰소리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매디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잠옷 가운데 기대어주며 진정하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모든 배낭여행자들은 매디의 모유만이 달콤한 위로를 안겨주는 만병통치약이라며 저마다 눈물겨운 사연이나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았다.
pp.138-139
“J.M.베리의 <피터팬>을 수업 중에 거의 다 읽었다고 했었잖아... 웬디를 가만 보면 머리칼이 하얗게 센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체구도 다시 쪼그라들고, 그 모든 이야기가 다 옛날 일이거든. 제인은 마거릿이라는 딸을 둔 평범한 어른이야...어른이 된 마거릿은 딸을 낳고 그 딸은 피터의 어머니가 되어줘. 그래서 아이들이 즐겁고 순수하고 무심하기만 하다면 이야기는 계속되는 거야.”
p.162
매디는 뻣뻣해져서 포옹을 받더니 마침내 붕괴되는 고대유적의 파사드처럼 밖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 매디는 흐느껴 울고, 흐느낌이 잦아들자 쿠브라는 눈물과 번진 화장을 닦아준 뒤 마치 축복을 내리듯 매디의 머리칼을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겨준다. 그것은 이유 없이 전한 위안에서 비롯된 눈물이었고 보상을 바라는 생각 없이 건넨 감정적인 응원이었기에, 그동안 나머지 우리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감했는지가 별안간 소름 끼칠 만큼 명확해졌다.
p.209
마사 포도원에 마련된 여름 휴양지에서는 SNS 관련 사회 부적응 및 문제를 일으킨 청소년들을 위하여 재버워키Jabberwocky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언어유희 시의 제목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무의미한 말’을 뜻함. —옮긴이] 캠프가 개최되고 있는데, 최근 들어 평소보다 차를 타고 이곳을 스쳐가는 아이들이 더 많아졌다.
p.211
캠프 아이들 사이에서도 권력 집단이 빠르게 생겨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편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인기 여학생들은 다른 인기 여학생들과 어울리며 인기 없는 여자애들을 모욕했고, 정치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식탁과 건물 벽에 나치 표식이나 욕설을 새겨놓았으며, 자기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독수리 상징 대신에 ‘이글크레스트의 작은 젖꼭지’를 그려 넣은 허술한 비밀 웹사이트를 시작했던 사악한 MMORPG 게임 중독자 녀석을 중심으로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게임 언어를 발명해냈는데 자기들끼리는 웃기다고 난리지만 대부분 끔찍하고 낯 뜨거운 성행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p.244
“그 사람을 내가 통제할 순 없잖아요. 나는 내 자신만 통제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얕잡아 보든 말든 더는 거기에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아요.” 렉스는 참으로 현명했다. 사람들에게 신뢰 쌓기 연습을 주도해야 할 사람은 바로 렉스였다. 이 세상의 수많은 아멜리아들은 고칠 수가 없다. 우린 자신만 고칠 수 있을 뿐이다.
p.249
우리는 스타십 업라이징Starship Uprising의 팬들로서, 역대 최고 인기 드라마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고 이따금씩 정치에 대한 욕설을 토로하기 위하여 팬들 사이에선 신적인 존재로 통하는 운영자의 느슨한 감독하에 행동하는 집단이다. 우리는 컴퓨터 스크린 뒤에 웅크리고서 좋아요와 싫어요를 누른다. 우리는 뜨끈뜨끈해진 노트북 컴퓨터를 배 위에 올려둔 자세로 댓글을 남긴다. 총공격도 감행한다. 우리는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p.273
금세 팬들 중 누군가 페이스 매시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몰라도 의도적으로 자기 팬들을 기만한 것은 사실임을 지적하자, 우리는 또 한 번 분노에 휩싸인다. 오랫동안 자제해왔던 태도에 작별을 고한 우리는 보이달 일당과 한패가 되어 심각하게 공격적인 댓글과 욕설에 동참한다. 디나라 고룬 사령관의 사진에 굵은 글씨로 ‘사기꾼’, ‘중독자’, 또는 ‘형편없는 엄마’라는 글귀를 합성해 SNS에 올리고 페이스의 이름을 태그한다.
p.294
나의 아내는 귀신이 되는 쪽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내는 단호히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귀신 놀이에 집착함으로써, 나는 내 마음속에서 아내를 아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기억은 매번 회상할 때마다 달라지므로, 아내를 그리워할 때마다 나는 아내를 점점 더 잃어간다. 귀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더는 그 사람을 예전 모습 그대로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를 강렬하게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귀신 들린 상황이 또 어디 있을까?
pp.304-305
부모로서 갖고 있는 유일한 힘은 가능한 한 아이에게 최상의 기회를 주는 것뿐이죠. 세츠코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있었을까요? 아뇨, 그럴 수 없었어요, 하지만 과거에 딸아이는 너무도 활기차고 매력적이어서 정말로 마음에 쏙 드는 딸이었기 때문에 난 아이를 그렇게 만들어주었던 추억을 고스란히 아이에게 제공하기로 결정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