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너라고 부르자 나라는 존재가 더욱 선명해졌다.
혼자. 아이가 다 크고 나니 집안엔 언제나 혼자였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지만 한창 육아와 살림에 매달리다 보면 그 사실을 잊게 된다. 그러다 문득 시간의 터널을 빠져 나오면 사무치도록 시린 외로움이 다가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온 것인가. 나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 나의 자리는 어디 있을까? 나에게 미래는 있는 걸까?
20년 가까이 그림책과 함께했던 제님 역시 그 무겁고 이상한 감정, 아프고 허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정경제를 돕기 위해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후로 그 감정은 시도때도 없이 마음을 무너뜨렸다. 다행스러운 건 책이 주는 위로를 알고 있었고, 바로 옆에 식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혼자인 시간을 견뎌야 한다면 마음이 도망쳐 가닿을 어딘가가 필요하다. 인생의 의미, 사회적 욕구, 개인의 자존감 등은 원한다고 해서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더욱 그렇다. 내 마음이 가닿을 수 있는 곳. 아무리 하잘것없고 사소하더라도 시든 마음을 한 순간 쉬게 해줄 곳이 필요하다.
제님에게 그곳은 책이었고 식물이었다. 책과 식물은 요란하지 않게 우울함이 스며든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무엇보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존재였다. 슬프건 아프건 그냥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운이 좋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의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그곳에서 쉼을 얻고 치유 받은 마음들이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렀다. 겨우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지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흔하디흔해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들, 마음을 기울여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 한번 마음을 주었더니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며 가슴에 서정이 깃들게 했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마음을 받아서라기보다 고인 마음이 흘러야 힘을 얻는 나이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너라고 부르자 나라는 존재가 더욱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