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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덩컨의 영혼의 몸짓


  • ISBN-13
    979-11-91625-52-3 (03680)
  • 출판사 / 임프린트
    이다북스 / 이다북스
  • 정가
    13,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2-05-19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이사도라 덩컨
  • 번역
    -
  • 메인주제어
    예술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이사도라덩컨 # 춤 # 무용 # 현대무용 # 자유무용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23 * 188 mm, 184 Page

책소개

나만의 자유로운 춤을 추고 싶다

 

토슈즈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춤을 추었으며, 기술적인 춤이 아닌 자연의 춤으로 세상에 나선 무용가. 무용에 니체의 철학과 그리스의 예술을 접목하고, 음악에 이끌려 가는 무용이 아니라 무용을 위한 음악을 착안한 예술가. 내면의 흐름을 춤으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혁신가.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누구보다 사랑을 갈구했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여자, 이사도라 덩컨. 

이사도라 덩컨은 기존의 표현 기교를 답습하지 않았다.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다”라며 표현의 창의성을 강조했고, 무용 예술을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대중에게 개방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도라 덩컨은 이후에 일어난 신무용 운동에 영향을 준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그녀의 무용 정신과 안무는 물론 그녀의 일생을 특징짓는 비범한 사건들, 그리고 그녀의 저술은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모든 무용가와 역사가들을 매혹한다. 

춤이라고는 발레가 전부였던 19세기 후반, 이사도라 덩컨은 상류층의 가난한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덩컨의 생일은 일반적으로 1878년 5월 27일로 알려져 있으나 197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견된 세례증명서에는 1877년 5월 26일로 기록되어 있다.

은행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불경기로 가족을 버리면서 음악 교사인 어머니의 손에 자란 덩컨은 공교육은 초등학교 5년밖에 이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춤을 가르치기도 했다. 덩컨이 어렸을 때부터 독학한 춤은 발레처럼 보수적이거나 선정적인 댄스가 아니라 자신의 감성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유로운 춤이었다. 한때 발레를 배우기도 했지만, 제약이 심하고 인공적인 기법에 의문을 품었다. 몸을 억지로 기묘하게 뒤틀어야 한다면 그것은 무용이 아니라 곡예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프로 무용수가 되고 싶었지만, 기교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덩컨의 무용은 대중의 기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덩컨의 무용은 너무나 생소하고 기존의 발레와 전혀 달라 무시당했으며, 고향인 샌프란시스코는 물론 뉴욕에서도 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녀의 착상과 동작은 사회의 인습을 완전히 무시했고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대중 공연에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그녀는 스물한 살 무렵 자신을 인정해줄 곳을 찾아 유럽으로 떠났다. 모국인 미국보다 더 도움 되는 예술 환경을 찾아간 것이다. 이 당시 경제적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어머니와 언니, 오빠와 함께 영국으로 가는 가축 운반선에 몸을 실어야 했다. 

 

 

무용가의 몸짓은 영혼의 찬란한 현현이다

 

덩컨이 유럽에 처음 등장했을 때인 19세기 말, 서구의 공연 무용은 침체기였다. 줄타기꾼과 곡예사들이 발끝으로 서서 춤추는 발레 무용수들과 공연장 무대를 함께 썼고,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남성 무용가로 손꼽히는 바츨라프 니진스키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학생이었으며,  천재 안무가 프레더릭 애슈턴이나 게오르게 발란친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헐렁하게 늘어뜨린 튜닉을 입고 맨발로 공연한 이사도라 덩컨은 관객들에게 무용에 대한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상을 안겨주었다. 그녀를 여신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인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발레만이 무용 예술로 인정받던 당시에 맨발에 가벼운 원피스 차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의 예술작품을 연구하면서, 이제껏 자신의 본능에만 의지해 연습하던 무용 동작이 이미 그 안에서 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고전적인 동작과 몸짓을 되살렸고 자기 것으로 승화했다. 그녀는 유적과 유물로만 남아 있던 예술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새롭게 부활시켰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무용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가르쳤다. 

“무용가의 몸짓은 영혼의 찬란한 현현이다.”

유명 여배우였던 패트릭 캠벨의 후원으로 런던의 사교모임에 초대받은 덩컨은 완벽하게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춤을 추었고, 그것은 남들과 전혀 다른 뚜렷한 차별성이었다. 덩컨의 무용은 런던과 파리의 시민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나 이후 전통적인 발레 형식에만 익숙하던 그들을 매혹했다. 특히 베를린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숲속의 요정처럼 가벼운 옷을 걸치고 맨발로 춤추는 젊은 여성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유럽 전역의 극장과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토슈즈와 튀튀를 벗어 던진 덩컨의 혁명적인 시도는 호기심에서 열광으로, 혁신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덩컨은 유럽에서 예술 활동을 꽃피웠다. 발레의 기본과 테크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동작들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생각, 감성을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표현한 맨발의 이사도라. 그녀는 독일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자신만의 자유로운 춤을 퍼뜨렸고, 그것은 이후 현대무용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조가 되었다. 

 

 

고유한 이미지로 표현하라

 

덩컨은 인간의 육체를 기존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발레가 최고의 무용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자유무용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냈다. 그녀는 육체를 춤추기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영혼이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 자체로 승격시켰으며,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다. 

덩컨의 무용은 정해진 룰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덩컨의 내적 지향에서 출발한 자기표현의 무용은 모던 댄스의 선구적 사상이자 방법론이 되었다. 발레의 보수적인 제약에서 벗어나는 데에 이바지했으며, 현대의 표현적인 무용이 태어나는 전조를 보여주었다. 덩컨은 창작무용을 창의적인 예술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무용가였다. 

이런 정신은 아동 무용 교육에도 이어졌다. 그녀의 무용 교육법은 기계식 체조나 발레 교육과는 차별되었다. 자연주의 교육체계를 무용교육에 접목해, 아동의 발달에 적합한 팔과 다리, 몸통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살렸으며, 기능 중심의 신체 훈련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의 합일을 추구했다. 또한 무용에 역사, 문학, 음악, 미술을 두루 엮어 통합 교육적 시스템을 강조했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동작을 추구하는 이사도라 덩컨의 무용에는 자유주의 사상이 깃들어 있었다. 덩컨은 기존의 인습적이고 형식적인 무용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정신세계와 이를 반영한 동작으로 자유무용을 표방했으며, 여기에 그리스라는 이국적 세계에 대한 동경을 반영했다. 아울러 형식적이기보다는 극적인 표현력을 강조했으며, 기존 무용에서 사용되던 음악과는 다른 다양성을 추구하며 음악에 종속되지 않는 무용을 추구했다. 춤의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력을 강조한 덩컨의 무용과 그 안에 담긴 정신은 1930년대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사도라 덩컨의 무용은 무용 자체는 물론 여러 면에서 파격이자 혁신이었다. 그녀는 복잡하고 체계화된 자세와 동작으로 발과 다리를 강조하던 발레와는 달리 전신을 이용하는 자연스러운 무용으로 추구해, 무용에 사용될 수 있는 동작의 종류를 크게 확장했다. 아울러 그녀는 형식에 치우친 의상들을 고대 그리스풍의 의복, 맨발, 묶지 않은 머리 등으로 대신했다. 코르셋과 페티코트, 긴 소매, 높은 목깃과 무거운 치마처럼 활동을 제한하는 의복에서 자신과 후대의 여성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글루크와 바그너, 바흐, 심지어 베토벤의 교향곡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 당시 그런 예는 거의 없었으므로 발레 애호가들이 그녀의 맨발에 분개한 것에 버금갈 만큼 음악평론가들은 그녀의 저돌적인 행동을 비난했다. 이에 반해 그녀는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로 무용을 창작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녀는 음악과 동작을 자신의 가장 내밀한 존재의 본성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다. 이는 자신의 예술이 위대한 음악을 사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기도 했다. 

 

 

다시 볼 수 없는 사랑이여

 

그녀 자신도 파격이었다. 평생을 불꽃 같은 열정으로 자유롭게 춤을 춘 그녀의 생애는 빛과 어둠이 극적으로 공존하면서, 시대를 앞질러간 이들이 으레 그렇듯 숭배의 대상이자 공격의 대상이었다. 독학으로 무용을 시작해 훗날 ‘자유무용의 창시자’로서 입지를 굳혔지만, 대담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탓에 호사가들에게 각종 가십거리를 제공했다.

사회적 금기에 끈질기게 저항한 그녀는 사생활에서도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녀는 무대디자이너 고든 크레이그와 함께 첫아이인 데어드르를 낳았지만, 둘 다 결혼은 원하지 않았다. 둘째 패트릭의 아버지는 재봉틀 기업 가문의 상속자이자 예술후원가인 패리스 싱어였다. 

1913년 덩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비극이 일어났다. 그녀의 두 아이와 보모가 탄 차가 파리 센강에 추락해 모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녀는 슬픔을 승화하기 위해 남아메리카와 프랑스, 독일을 방문해 공연하는 등 무용에 몰두했으나 이전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20년, 모스크바에 무용 학교를 설립하라는 제안을 받았고, 혁명적인 기질을 가진 그녀에게 그곳은 약속의 땅으로 보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17세 연하의 시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을 만났다. 결혼을 꺼리던 그녀였지만, 미국 공연에 함께 가기 위해 1922년 그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 미국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해 있었고, 덩컨 부부는 볼셰비키 조직원이라는 부당한 꼬리표를 얻었다. 덩컨은 다시 모국을 떠나며 씁쓸한 심경으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녕, 미국이여. 다시는 볼 수 없겠군요.” 

이후 그녀는 미국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으며, 유럽에서 예세닌과 불행한 나날을 이어갔다.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악화된 예세닌은 덩컨에게 등을 돌렸고, 소련으로 혼자 돌아가 1925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랑스 리비에라의 니스에서 위태롭게 지내던 덩컨은 1927년 9월 14일 니스에서 자동차 뒷바퀴에 스카프가 엉키며 목이 졸리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삶만큼 그녀의 죽음도 극적이었다.

덩컨은 상당히 많은 양의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생전에는 그녀의 글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녀의 춤보다는 훨씬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덩컨이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안무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자, 그 글들은 그녀의 무용을 매우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개인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졌다. 때로는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전도하듯이 쓴 글들은 덩컨의 안무와 공연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이사도라 덩컨은 인위적인 기술이나 인습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의 아름다움에 의지했다. 그로써 경직된 공식과 화려하지만 공허한 기술적 기교에 의존하던 무용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으며, 체제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를 추구했다. 그녀의 사상은 시대보다 앞서나갔고 사회적 인습을 대담하게 벗어버렸다. 형식과 기교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력을 중시한 그의 무용은 창작 댄스를 창조적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역사적 사건이었고, 이후 현대 무용을 정의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목차

나는 미국이 춤추는 것을 본다

모든 것의 무용 

스스로 우러나게 하라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새로운 미국의 춤

미래의 무용

강연을 위한 짧은 글

나의 예술

파르테논

언어와 춤

무용가와 자연

무용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자연의 움직임을 연구하라

삶의 학교

춤추는 아이를 보라

예술의 각성

무용 학교를 세우는 뜻

나는 호소한다

움직임은 생명이다

아름다움은 어떻게 싹트는가

비극으로 본 무용

그리스의 극장

월터 담로쉬

교육과 무용

그대여, 나의 조국이여

테르프시코레

예술의 화음

그리스의 무용

원형극장에 서서

청춘과 무용

영혼의 몸짓

깊이

위대한 근원

리하르트 바그너

진짜와 가짜

나는 나일 뿐이다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내가 꿈꾸는 무용

모스크바에서

성찰, 모스크바 이후

나를 키운 것

나의 소원

종교와 사랑에 관한 무용

위대한 시작

아이들에게 예술을

춤추는 시간

 

본문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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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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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이사도라 덩컨
자유로운 형식의 창작 무용을 창시하고 이를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린다.
1877년 5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은행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불경기로 가족을 버리면서 음악 교사인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공교육은 초등학교 5년밖에 이수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1899년 시카고에서 데뷔 공연을 했으나 전통 발레가 아니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배척당하자 1900년 유럽으로 건너갔다. 자신만의 생각과 감성에서 우러나온 자유로운 춤은 유럽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1904년 독일 베를린에 무용 학교를 세운 데 이어 1905년 소련을 방문해 공연하기도 했다. 무용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13년 두 자녀를 자동차사고로 잃었으며, 1922년 16세 연하의 시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과 결혼했으나 1925년 예세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27년 9월 14일, 프랑스 니스에서 지내던 중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긴 스카프가 차의 뒷바퀴에 감기는 질식사로 숨졌다.
주요 초연 작품으로 〈Ballspiel〉(1903년경) 〈Classical Duet〉(1903년) 〈Petals〉(1905년경) 〈The Furies〉(1906년경) 〈The Three Graces〉(1918년) 〈The Mother〉(1921년) 〈The Revolutionary〉(1922년경) 등이 있으며, 책으로는 생전에 쓴 글과 편지, 인터뷰를 묶은 《The Art of the Dance》와 자서전 《My Lif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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