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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 ISBN-13
    979-11-91625-41-7 (03360)
  • 출판사 / 임프린트
    이다북스 / 이다북스
  • 정가
    15,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2-04-28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체사레 베카리아
  • 번역
    -
  • 메인주제어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사회, 사회과학 #법 #범죄 # 형벌 # 범죄와형벌 # 베카리아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23 * 188 mm, 272 Page

책소개

체사레 베카리아, 그리고 《범죄와 형벌》

 

체사레 베카리아는 이탈리아의 법학자, 철학자,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서 계몽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다. 특히 그는 현대 ‘근대 형법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1738년 밀라노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파르마의 예수회대학에서 조기교육을 받았으며 1758년 파비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몽테스키외를 공부하면서 경제학으로 관심을 돌려 1762년 밀라노 주의 통화 무질서에 관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경제학자인 피에트로 베리, 알레산드로 베리 형제와 가까이 지낸 그는 두 형제를 포함해 개혁적 성향의 지식인들과 함께 푸니 아카데미라는 모임을 결성했으며, 그 안에서 주로 형사 사법 제도 개혁을 논의했다. 이 모임을 통해 디데로, 헬베티우스, 몽테스키외, 흄과 같은 프랑스와 영국의 정치 철학자들도 알게 되었다. 

26세 때인 1764년, 그는 《범죄와 형벌》이라는 짧지만 기념비적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고문 역사에 대한 글을 쓰고 있던 피에트로와 감옥의 끔찍한 상황을 직접 경험한 밀라노 교도소 관리 알레산드로 베리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 책은 이후 근대 범죄학과 형사정책이 시작점이 되었다. 

억측과 예단, 종교적 편견으로 뒤덮인 야만적인 행형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역사적 사건이기도 한 이 책은 형벌의 목적을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전근대적인 범죄관과 형벌체계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국가적 형벌 시스템에서 근대 이전과 근대를 나누는 저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사회계약설에 의한 국가형벌권, 죄형법정주의 같은 주요 법 원리를 논리적으로 다루는 한편, 고문과 사형 등 잔혹한 형벌 제도를 비판하고 형벌권을 사회계약으로 규정함으로써 근대 형법학의 기초를 세웠다.

 

 

《범죄와 형벌》, 그리고 체사레 베카리아

 

1764년, 가명으로 발표한 책 한 권이 이탈리아에서 출간했다. 이 책이 나올 당시는 절대왕정의 말엽으로, 로마 교황청은 이 책이 나오자 금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 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형벌에 관한 논리 정연하고 새로운 주장들에 유럽의 지식 사회를 매료시켰다.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인간을 상정하는 당시 계몽주의 사조에 호응한 베카리아는 《범죄와 형벌》에서 법은 개인들의 사회적 합의를 지속하기 위한 조건이며, 형벌은 사회 전체의 복리를 위해 범죄를 억제하고 예방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즉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에 대한 응징이거나 이미 범해진 범죄를 원상태로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범죄 예방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정도의 형벌이면 족하다고 본 그는 《범죄와 형벌》에서 형벌이 가하는 손해가 공익이 입는 손실보다 크다면 형벌의 목적이 달성되며, 형벌은 공익을 훼손한 정도에 비례해야 하므로 과도한 처벌은 불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토대로 고문과 사형 제도를 반대했다. 고문이 고통의 강도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점에서 고문을 반대했으며, 개인이 양도한 자유에는 생명이 포함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형보다는 종신노역형을 주장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사회에는 범죄가 존재하며, 이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형벌 역시 존재했다. 그 형벌 중 사형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형벌이다. 사형은 범죄인의 생명을 박탈해 그의 존재를 사회로부터 영구히 제거하고, 이로써 그에 따른 장래의 위험성으로부터 국가를 방위한다.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인도적인 형벌을 주장했으며, 사형과 같은 잔인한 형벌은 폐지하여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베카리아는 그중 한 명이었다.

베카리아는 고문 역시 비판했다. 《범죄와 형벌》에서 그는 고문을 식인종에게나 합당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진실의 기준을 고문에 따른 고통을 참는 피의자의 신체적 또는 정신적 힘에 둔다면, 건장한 범죄자는 면책하고 결백하지만 허약한 사람은 유죄를 선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통의 감각이 고문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잠시라고 해도 그 고통을 면할 선택 외에 그 어떤 자유 선택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베카리아는 이 책에서 고문을 통한 자백으로 진실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지 않으며 부당하다고 강조한다.

《범죄와 형벌》에서 베카리아는 고문과 사형 문제를 특히 강조한 것은 물론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원칙들을 펼치기도 했다. 형벌에는 보복이 아닌 예방적 기능이 있어야 하고, 형벌은 범죄에 비례해야 하며, 형벌의 정도가 아니라 높은 개연성에 따라 처벌하면 예방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물론 유죄 판결 절차는 공개되어야 하며, 형벌이 효과 있으려면 신속한 처벌이 유용하다고도 했다.

그가 살던 때는 절대왕정 시기로, 왕의 권한이 아주 강력했다. 이를 감안한다면, 《범죄와 형벌》은 당시 통치자들에게는 매우 과격한 저항이었지만, 합리적인 형법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역사적인 선물이었고, 근대 형법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선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을 넘어 호응한 ‘금서’

 

이 책은 출간하자마자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1765년 프랑스어판이 나온 데 이어 1800년까지 23개의 이탈리아어판, 14개의 프랑스어판, 11개의 영어판이 나왔으며,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그리스, 러시아, 일본을 비롯해 22개국의 국어로 번역되었다. 

베카리아는 자신의 생각이 당시 법체계에 비판적이어서 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정부의 반발을 우려해 익명으로 《범죄와 형벌》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책은 크게 호평받았다. 러시아 군주인 예카테리나 2세는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미국 헌법 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정부가 이 책을 승인한 것이 명확해지자 베카리아는 이 책을 실명으로 다시 출판했다. 

이 책은 출간 즉각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당시 법률학자들은 베카리아의 글을 환영했고, 러시아 군주를 비롯한 유럽 황제들은 그의 원칙을 따를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베카리아의 주장을 납득한 동시대인은 거의 없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이 세계 최초로 사형을 폐지했을 때조차 그 이유는 사형의 효용성이 부족하다는 베카리아의 주장을 따른 것이었을 뿐 국가에 시민을 처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범죄와 형벌》에 감명 받은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1766년에 이 책에 대한 해설서를 썼다. 볼테르는 이 책을 ‘우리의 정신을 치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치료법’이라며 격찬했다. 볼테르의 종교적, 철학적 관용은 베카리아에게 영향을 주었고, 볼테르 역시 베카리아를 통해 기존의 가혹하고 모순적이며 자의적인 법제와 관행을 막을 제도적 원리를 확인했다. 

베카리아는 국가를 계약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과 최대 다수의 효용, 즉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했으며 이는 이 책을 관통한다. 이런 그의 관점은 생전에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수록된 권리를 형성하는 데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베카리아와 볼테르

 

베카리아와 그의 《범죄와 형벌》이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데에는 볼테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볼테르는 18세기 유럽의 지성사 및 사회사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런 볼테르가 범죄와 형벌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761년 툴루즈에서 발생한 사건 때문이었다. 

1761년 10월, 툴루즈의 평범한 상인이던 장 칼라스의 아들 마크 앙투안이 집에서 목매달아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인 장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라고 모함했고, 칼라스의 가족은 모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당시 자살은 심각한 범죄로 여겨졌기 때문에 칼라스와 그의 가족은 앙투안이 살인범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진술했다. 

노쇠한 칼라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1762년 3월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수레바퀴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칼라스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신에게 처형을 주관한 이들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이 일로 개신교도들을 뿌리 뽑을 수 있으리라 믿은 가톨릭 세력은 비난받았고, 사형수의 처형 장면을 축제거리로 여기던 시민들 역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볼테르는 칼라스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볼테르는 재판정에서 “칼라스는 반가톨릭 광신자가 아니며, 그의 아들은 도박 빚 때문에 자살했다”라고 강력하게 변호했다. 이런 볼테르의 주장은 받아들여져, 이듬해인 1764년 프랑스 황제 루이 15세는 사형을 선고한 재판관을 파면하고 칼라스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종교분쟁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이자 프랑스 사법제도의 개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볼테르는 칼라스 사건을 통해 가톨릭교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한편 종교적 관용과 자유를 국가 활동의 기본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쓴 《관용론》에서 볼테르는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볼테르가 부각시킨 칼라스 사건 및 관용론은 이후 유럽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밀라노의 개혁적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들 중 한 명인 베카리아는 볼테르의 관용과 자유를 뛰어넘어 잔혹한 형벌 제도와 자의적인 형사 절차를 제도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1764년 《범죄와 형벌》로 정리했다. 이 책은 볼테르의 관용보다 더 빠르게 유럽을 강타했으며, 볼테르 역시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 곧바로 호응했다. 이 책의 프랑스판이 출간된 다음 해인 1766년 볼테르는 이 책에 대한 해설을 썼는데, 이 글에서 베카리아를 격찬했다. 

볼테르는 해설에서 이단자 처벌, 신성모독, 마녀재판, 자살 등에 대한 기존 처벌 관행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세세한 예를 들어 비판했다. 이런 볼테르의 해설은 베카리아의 가치를 한층 높여주어, 베카리아의 각국어 번역본에는 볼테르의 해설이 함께 포함된 저작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베카리오와 그의 책 《범죄와 형벌》,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볼테르의 해설은 형벌 제도의 개혁, 형사 절차 정비의 지침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볼테르가 격찬한 《범죄와 형벌》은 근대 형법 체계를 출발시킨 책으로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범죄와 형벌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필수적인 저작물로 여겨진다. 하지만 베카리아의 비판은 당대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 시대의 숙제로 남아 있다. 현실과 법의 거리감을 언급할 때마다 이 책이 빠지지 않는 지금, 우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읽고 찾을까? 그것은 관련 전문가들만의 일이 아니다. 법의 테두리에 모여 사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형벌이 범죄를 예방하면서도 범죄의 무게를 올바르게 잡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과 죄형법정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사회의 변화와 함께 법도 변화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바꿔야 옳은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목차

범죄와 형벌

서론 / 형벌의 기원 / 형벌의 권리 / 앞서 언급한 원칙의 결과 / 법률의 해석 / 법의 모호성 / 범죄와 형벌의 비례 / 범죄의 경중에 대한 평가 / 범죄의 구분 / 명예 / 결투 / 공공의 안정을 해치는 죄 / 형벌의 목적 / 증인의 신뢰성 / 범죄의 입증과 증거, 재판 방식 / 밀고 / 고문 / 벌금형 / 선서 / 형벌의 신속성 / 폭력 행위 / 상류층에 대한 처벌 / 절도 / 명예훼손 / 무위도식에 대하여 / 추방과 재산몰수형 / 가족의 정신 / 형벌의 관대함 / 사형 / 미결구금 / 기소와 시효 /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 / 자살과 국적이탈 / 밀수 / 파산 / 성역에 대하여 / 현상금에 대하여 / 미수, 공범과 사면 / 유도신문 / 특별한 유형의 범죄 / 유용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 / 범죄의 예방 수단 / 지식에 대하여 / 재판관 / 포상 / 교육 / 사면 / 결론 

 

볼테르의 해설

나는 왜 해설서를 쓰는가 / 어떤 형벌은 옳고 그른가 / 이단자에 대한 처벌 / 이단을 어떻게 다룰까 / 신성모독에 대하여 / 로마인들이 보여준 신성모독에 대한 관용 / 포교에 관한 죄와 앙투안 사건 / 시몽 모랭에 관한 이야기 / 마녀에 대하여 / 사형은 올바른 형벌인가 / 형벌의 집행에 대하여 / 여전히 살아 있는 치욕, 고문 / 잔혹한 재판소에 대하여 / 정치법과 자연법의 차이 / 대역죄, 그리고 오귀스트 드 투의 처형에 대하여 / 고해를 통한 범죄의 누설 문제에 대하여 / 화폐 위조에 대하여 / 가정 내 절도는 범죄인가 / 자살에 대하여 / 특정한 유형의 손상 / 재산 몰수는 정당한가 / 형사절차와 그 밖의 방식에 대하여 / 개선에 대한 생각 

본문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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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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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저자 : 체사레 베카리아
법학자,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서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사상가 중 한 명이다.
1738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파르마의 예수회대학에서 조기교육을 받고 1758년 파비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이후 몽테스키외를 공부하면서 경제학을 배웠으며, 개혁적 성향의 지식인들과 푸니 아카데미라는 모임을 결성해 주로 형사 사법 제도 개혁을 논의했다. 26세 때인 1764년에 발표한 《범죄와 형벌》은 형벌의 목적을 새롭게 설정함으로써 전근대적인 범죄관과 형벌체계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국가적 형벌 시스템에서 근대 이전과 근대를 나누는 저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고문과 사형 등 잔혹한 형벌 제도를 비판하고, 죄형법정주의를 창시했으며, 형벌권을 사회계약으로 규정함으로써 근대 형법의 기초를 세웠다.
《범죄와 형벌》을 출간한 후 파리로 초대받아 당시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수줍음을 타는 성격 탓에 3주 후에 밀라노로 돌아왔고, 이후로는 해외로 나가지 않았다. 1768년 11월 밀라노의 팔라틴대학에서 그를 위해 특별히 설립한 법학 및 경제학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771년에는 최고경제평의회의 일원으로, 1791년에는 사법개혁이사회에 임명되어 사법 개혁에 공헌했다. 56세 때인 1794년 밀라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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