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은 원래 보라색이었다?
‘당근 색은?’ 하고 물으면 누구나 주황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진짜 주황색이야?’라고 재차 물으면 ‘왜 그런 걸 물어?’라며 의아해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당근은 주황색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근은 원래 보라색이었다. 보라색 당근이 보통이던 시절, 가끔 나오는 흰색과 주황색 당근은 돌연변이 품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네덜란드에서 주황색 당근을 육성하였다. 네덜란드에서 개량시킨 주황색 당근이 맛도 좋고 크기도 커서 널리 보급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주황색 당근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도 분홍색, 보라색, 흰색, 노란색 등의 당근이 생산되고 있다. 우리가 주로 먹는 게 주황색 당근일 뿐이다.
이렇듯 하나의 외양에는 고정관념이 생길 만한 대표적인 색깔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거나 찾아보면 다양한 색깔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양한 색을 통해 고정관념을 넘어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넓혀 주는 그림책이 나왔다. ‘사과는 빨갛고 바나나는 노랗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다른 색도 있어!’라고 말해 주는 그림책, 《이 색 다 바나나》이다.
제이슨 풀포드와 타마라 숍신 두 저자는 미국 휘트니 뮤지엄과 협업을 통해 그림책 《이 색 다 바나나》를 출간했다. 국내 번역 출간은 이번이 처음인데, 현대어린이책미술관 ‘열린서재’에 원서가 전시되어 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 책의 원서를 소장하고 있는 독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어렵지 않은 영어에 다채로운 색감으로 구성되어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된 《이 색 다 바나나》는 어떤 책이기에 원서부터 그리 인기가 많았을까?
사과가 다 빨간 건 아니야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어릴 때부터 들어온 동요이다. 원숭이 엉덩이와 사과는 빨간색의 대표 주자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뇌리에 새겨져 있는데 그림책 《이 색 다 바나나》에서는 첫 번째 장에서부터 ‘사과가 항상 빨간 건 아니’라고 말한다. 전 세계 사과를 살펴보면 핑크색 사과, 황금색 사과, 초록색 사과도 있다. 오른쪽 페이지에 사과의 색이 다양한 색깔로 보인다. 흐린 배 색깔도 있고 진한 초록색도 있고 자줏빛도 있다. 이 그림책은 빨간 사과에 갇히지 말고 사과의 외양에 다양한 색을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다음 장을 펼치면 ‘풀도 항상 초록은 아니야’라고 말한다. 노란색, 진녹색, 파란색, 보라색 등 풀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색들이 차르륵 펼쳐진다. 구름은 어떨까? 보통은 흰색이지만 폭풍우 칠 때나 해 질 녘에 하늘을 보면 다른 구름 색깔을 확인할 수 있다. 한밤중에 구름 색깔은 짙은 회색 아니면 검정이다. 빨간 장미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많이들 알고 있다. 흰장미도 있고, 연한 핑크빛도 있고, 주홍빛 장미도 있으니까. 불도 여러 가지 색이다. 푸르스름한 색도 있고 아이보리색도 있고 갈색도 있다. 불은 위험하니까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봐야 한다. 하지만 흙은 만져도 된다. 만져 보고 굴러 보고 옷에 묻은 흙의 색도 확인해 보라고 권한다. 흙 또한 지역에 따라 위치에 따라 색이 많이 다르다. 얼음 색은 다 비슷할까? 냉동실에 들어 있는 얼음만 상상하면 안 된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호수의 색을 떠올려 보자. 어떤 에뮤는 짙은 초록색 알을 낳는다. 울새 알도 파랗다. 닭의 달걀도 흰색, 청색, 연한 갈색 등 다양하다. 개도 품종에 따라 색이 다르고 종이 섞인 개는 더욱 자유로운 색으로 태어난다. 바나나를 먹을 때 바나나 색이 점점 갈색으로 변해가는 걸 흔하게 볼 수 있다. 푸르스름한 색에서 노르스름해졌다가 거무스름해지는 바나나는 색을 보면 먹어야 할 타이밍을 알아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피부색을 이야기한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의 피부색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만 말한다.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에 있는 빈 네모 칸 뒤에 손을 갖다 대 보라고 권한다. 빈 네모 구멍 주위에 여러 색이 있어서 그런지 내 피부색이 그 사이에서 유달리 도드라져 보인다. 이어서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세계의 많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사고의 이동, 확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외양’ 속에 존재하는 ‘실재’ 다시 보기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가르치며 그림책 심리학을 연구하고 있는 번역가 신혜은은 이 책을 보자마자 머릿속 대충돌을 경험했다고 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했고,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인식하고 있었나?’ 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색 다 바나나》는 다양한 ‘외양’ 속에 존재하는 ‘실재’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외양과 실재에 대한 숙고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도 적용이 된다. 고양이한테 개 가면을 씌워 놓고 “이게 고양이일까? 개일까?”를 질문하는 것이다. 색깔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철학적인 사고에까지 가 닿는다. 그래서 번역가는 《이 색 다 바나나》 이 책은 세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나에 대한, 우리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노란 꽃밭을 보고 무슨 꽃이냐고 물었을 때 ‘토끼풀꽃’이라는 답을 듣고 나면 ‘어, 내가 아는 그 토끼풀이 아니네’라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견고한 선입견의 경계를 느슨하게 풀고 다른 외양과 색감을 받아들이게 된다. 유연한 사고, 사고의 확장, 경계를 허무는 일 등 이 작고 분량도 많지 않은 그림책은 우리에게 수많은 제안을 던진다. 이 책 마지막에 자기 손을 갖다 대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까지 무심코 보아왔던 세상 모든 것들을 다시!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작은 그림책이 선사하기에 매우 크고 묵직한 보답이다.
아이들과 함께해보는 색깔 놀이
그림책 《이 색 다 바나나》는 아이들과 함께 색깔 놀이를 직접 해 보기에 매우 적합한 책이다. 책에 나와 있는 다양한 색 차트를 보여 주면서 이 책에 나오지 않는 과일, 야채, 사물, 동물 등의 색깔을 새롭게 찾아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이 책에 나오는 사과, 바나나, 강아지 등을 그린 뒤 다양한 색깔을 칠해 보는 체험도 가능할 것이다. 무궁무진한 색깔 놀이는 이 책을 만든 두 저자가 독자에게 정말 원했던 적극적인 독서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