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 마녀 말고 다른 이야기
일반적인 어린이 책의 이야기를 한번 떠올려 보자. 예로 들기에 누구나 잘 아는 고전 동화가 좋을 듯하다. 《백설 공주》에는 독사과를 먹은 공주를 구하는 왕자님이 나오고, 《신데렐라》는 재투성이 신데렐라를 신분 상승시켜 주는 왕자님이 나온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라푼젤》에도 공주를 구출하는 왕자님이 나온다. 몇 가지만 예로 들었는데 공주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가 많다. 백설 공주의 새엄마나 신데렐라의 새엄마는 마녀이거나 마녀 같은 역할이다. 마녀들은 주로 악역을 도맡아 한다. 공주는 구해 줘야 하는 존재이고 마녀는 물리쳐야 하는 여자이다. 이렇듯 오래된 어린이 책에 드러나는 여성들은 대체로 공주 아니면 마녀였다.
현대 아동문학은 어떨까? “지난 어린이 책 역사를 돌아보면 모험도 사랑도 도전과 극복도 1세계 국적을 지닌 비유색인종, 성별로는 남성 어린이의 몫이 압도적으로 컸다.”(《오늘의 어린이책》_<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나를 위해서> 중에서_김지은) 21세기에도 어린이 책의 주인공은 백인 남자아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이다. 남자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고 적을 물리치고 어려운 도전을 감행하는 동안 여자아이는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나오곤 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어린이 책의 이야기 패턴은 틀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고 지난 몇 년 동안에는 많은 어린이 책에서 색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국내에 수십 권의 그림책이 번역 출간되어 고정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인기 작가 다비드 칼리의 새로운 그림책에도 그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흔해 빠진 이야기는 싫어!》는 어린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클리셰를 비틀어 비판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클리셰만 쫓아가도 지금까지 어린이 책이 주로 다뤄 온 이야기의 전형을 파악할 수 있다.
틀에 박힌 생각은 내다 버려!
《흔해 빠진 이야기는 싫어!》는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기사의 이야기란다. 어떤 기사냐 하면….” 그러자 딸은 대뜸 싫다고 말한다.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기사 얘기는 너무 흔하니까.” 그리고 공주는 스스로 자기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20년대는 여자아이가 이렇게 당차게 말하는 세상이다. 물론 모든 여자아이가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면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여자아이건 남자아이건 생각의 전환을 해 보게 될 것이다. 아빠는 한 발 양보해서 사악한 용을 죽이러 가는 기사 이야기로 바꿔 본다. 하지만 또 딸이 용은 왜 언제나 사악해야 하냐고 묻는다. 아빠는 어쩔 수 없는 카우보이 이야기를 제안해 본다. 딸은 또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말한다. “카우보이면 남자잖아. 왜 남자만 영웅이야?” 여자 이야기를 원하는 딸을 위해 아빠는 그럼 마녀 이야기는 어떠냐고 물어본다.
“아니, 왜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구해 줘야 될 사람 아니면 마녀인 거야?”
딸아이가 아빠 말에 일침을 가한다. 아빠는 계속해서 딸에게 구박을 받는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던져 본다. 딸의 요구대로 다음은 카우보이 여자애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카우보이 여자애가 분홍색 옷을 입고 있다. 그러자 딸아이가 또 뭐라고 한소리 한다. 왜 분홍색 옷을 입고 있냐고? 여자애들은 분홍색을 좋아하잖아,라고 아빠가 말하자, 딸은 아빠에게 ‘틀에 박힌 생각’ 즉 클리셰라고 외친다.
클리셰를 다 빼면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이렇게 이 이야기는 수많은 클리셰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빠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를 반복하고 딸은 계속 클리셰를 깨는 이야기를 던진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에, 여성 캐릭터에 대해 얼마나 많은 클리셰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다행한 건 아빠가 딸의 이야기를 묵살하지 않고 새로운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준다. 아이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선을 긋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를 만들어 보게끔 한다. 그러다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우스꽝스럽게 진행될 때도 있다. 이 그림책을 다 읽고 나면 ‘이야기’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뻔하지 않은 이야기가 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뻔하지 않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그림책은 ‘젠더 감수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이야기 속 여성의 역할이란 과연 어디까지 허용 가능하며,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여성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워 왔는지 고민해 보게 된다. 그래서 특히 이 책은 등장인물들처럼 부모와 아이에게 꼭 함께 읽기를 추천하고 싶다.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젠더 감수성과 아이가 겪어야 할 시대의 젠더 감수성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이야기는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아이와 아빠의 이야기 짓기는 중요한 의미를 남긴다. 고전적인 이야기에 ‘흔해 빠진’ 클리셰가 너무 많다는 것. 여자는 공주 아니면 마녀이고 기사나 왕자는 물리치고 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존재라는 것. 그렇다고 클리셰를 무조건 버리는 것도 이야기의 좋은 구성 요건은 아니라는 것. 클리셰라고 무조건 빼다 보면 이야기의 핵심은 없고 이야기가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할 것인가. 바뀌어 가고 있는 세상과 발맞춰 아이들에게 들려줄 ‘흔해 빠지지 않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지, 깊이 있게 고민해 볼 일이다.
《흔해 빠진 이야기는 싫어!》는 다비드 칼리 특유의 유머가 살아 있다. 아빠와 아이가 또는 엄마와 아이가 즐겁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읽기에 재미있는 그림책이다. 그림책 《끝까지 제대로》와 《쉿!》을 함께 작업한 화가 안나 아파리시오 카탈라는 2021년 볼로냐국제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다. 동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중 하나로 인정받은 카탈라는 지금 아이들에게 흥미에 맞는 카우보이 여성 캐럭터를 유머 있게 잘 살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