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밥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되었다. 밥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런 만큼 밥을 할 줄 아는 것은 중요해져서다. 자기가 먹을 한 끼를 온전히 자기 힘으로 차려 본 사람은 다 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차린 밥 한 끼가 자존감을 높여 주고 살아가는 힘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 8쪽
몸을 움직여 산이나 들로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채집해 본 사람은 밥과 반찬을 입에 넣으며 이것이 누군가의 고된 노동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몸으로 안다. 쫓기며 사느라 끼니를 때운다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소홀히 대하고 있는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한 끼를 스스로 대접하고 싶다는 마음을 깨우는 것이야말로 농사의 원천이고 요리의 시작이다. - 34쪽
가끔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골려 먹는 재미를 즐긴다. 남편이 남의 편인 것 같고 괜히 밉상일 때가 있다. 술 마신 다음 날 혹시나 해장국이라도 시원하게 한 그릇 끓여 주려나 하고 은근히 바랄 때 국물 한 방울 없는 밥상으로 소심한 복수를 한다. 하지만 그 복수 안에는 남편을 향한 나만의 배려가 있음을 남편은 눈치채지 못한다. 해장국을 끓이는 대신 콩나물과 북어로 해장밥을 한다. 입에서는 쓰지만 술독을 해결하는 훌륭한 밥임을 남편이 알 리는 없다. 쉿, 비밀이다. - 88쪽
반찬이 필요 없는 한 그릇 밥을 하게 되고, 그 밥이 맛있고 만들기 쉽다고 이야기하게 된 배경에도 시래기밥이 있다. 시래기밥은 여전히 맛있고 여전히 매력적이며 여전히 나를 심하게 추동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밥집을 시작하면 어때?’라고. - 122쪽
어머니의 소박한 행복을 내가 책임져야겠다는 결심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지는 의미로 다시 죽순밥을 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오징어회로 나의 마음을 다지기는 어려우니 쉽게 구해지는 죽순밥으로 대신한다고 누가 뭐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가 오고 대나무밭에 죽순이 쑥쑥 올라온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스스로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순을 구해다 밥을 해서 양념장에 쓱쓱 비빈다. 쓱쓱 비벼 한 숟가락씩 입에 넣을 때마다 어머니의 행복이 쑥쑥 자라기를 바라면서. - 186쪽
치자 열매로 색을 내서 노란 전을 부치고 적을 부치는 추석을 코앞에 두고 어머니는 십 여 년을 같이 살던 나를 두고 아버지에게로 가셨다. 가슴이 벌렁거리며 아프고 숨이 가빠졌다. 그해 추석에 노란 치자 물을 곱게 내어, 의식을 치르듯, 밥을 지어 먹었다. 그 뒤로 가끔 치자 열매의 노란색을 밥에 입혀 먹는다. 심장의 열을 내리고 화를 삭이는 치자의 효능을 밥에 얹는 것이기도 하고, 나를 위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나에게 주는 위로라는 의미를 더해 치자밥을 지어 먹었다. - 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