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9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했던 건, 그 동네에서 내가 들어갔던 모든 공간에 강하준의 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계약하기 위해 갔던 카페에도, 계약을 하고 간단히 밥을 먹은 작은 식당에도, 심지어 버스에 타기 전에 물을 한 병 사기 위해 들렀던 편의점에도 모두 강하준 사인이 있었다. 심지어 그 모든 곳에는 사인만 있는 게 아니라 가게 주인과 밝은 표정으로 어깨동무까지 한 강하준의 사진 함께 걸려 있었다. 그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강하준이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복선처럼 느껴졌다.
P. 57
처음 맡아보는 고수의 향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고수가 잔뜩 들어간 쌀국수. 나는 고민하고 있다. 아직 시도해 보지 않은 이 음식이 과연 내 입에 맞을까?
그때 앞에 있는 하준이 형이 내 삶의 고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색다른 존재. 없다고 아쉬울 것도, 있어서 부러울 것도 없는 존재가 문득 내 앞에 있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을 뿐, 딱히 좋고 싫음도 없다. 다만 그저 나의 선입견이 나도 모르는 고정관념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겠지.
이 모든 새로움이 싫지는 않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수북한 고수처럼 말이다. 나는 그냥 입에 넣고, 꿀꺽, 삼켜 보기로 했다.
P. 64
문득 하준이 형을 만나고 내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내 삶에 하준이 형이 등장하기 전까지 나는 그저 커다란 타운하우스에 초라한 짐을 두고 살아가는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마웠다. 나에게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해준 하준이 형이. 그리고 내 삶을 한순간에 바꿔버린 이 모든 것이. 그래서 나는 저 형이 하는 저 말도 안 되는 행동들에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P. 88
“어쩌면 너한테 자기 과거를 보는지도 모르지.”
“저한테요?”
“응. 강하준 평범했거든.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어. 학교 다니고, 맨날 수업 째고 술 마시고, 잔디밭에서 기타나 치고. 어느 학교나 있던 평범하던 게으른 대학생이었는데, 우연히 축제공연에서 부른 자작곡이 빵 뜬 거지. 그때까지는 지가 특별한지도 모르고 살던 놈이야.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스타가 되니까. 정말 모든 게 달라져 버린 거고…….”
“에이…… 그래도 저 외모가 그렇게 평범할 수는 없잖아요.”
“TV에서만 보고, 잘 꾸며진 모습만 보니까 환상이라는 게 생겨서 그렇지. 아무리 특별해 보이는 사람도 매일 옆에서 자주 보면 그냥 평범해. 강하준도 그랬겠지. 물론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옷도 잘 입고, 노래도 잘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냥 친구지. 뭐. 다 그렇게 살았던 거야. 지도 지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