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불교란 어떤 것일까? 교조인 불타 석가모니의 순수한 가르침[교법(敎法)]이었을까? 아니면 조사(祖師)의 언행이나 선사(禪師)들의 직설적인 자기주장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절에 가서 복을 비는 것이었을까?
불교란 더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아가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불교에서는 불타 석가모니의 인간과 사상이 무엇인지는 소홀히 다루어 왔다. 부처님의 원초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 원형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서는 불교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옳은 불교 신자가 되기 어렵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근본 불교에 대한 학문적인 인식이나 탐구가 거의 없었다. '소승 불교'라고 해서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자 문화권에 예속된 중국 불교의 식민지적인 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들은풍월로, 혹은 지레짐작으로 저마다 자기 불교를 이루어 온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은 항상 그 원천으로 돌아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상은 그 원초의 정신을 회복하게 되고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근본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박하게 직접 전한다. 불교 사상의 원천을 직접 보여 준다.
(<근본불교> 중에서)
소박하고 솔직한 전달
열반 이후 2500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러간 이제 우리는 부처님을 만날 길이 없다. 그러나 ≪아함경≫과 당시 승단의 생활 규범을 기록한 율장(律藏)을 통해서 우리는 부처님 살아 계실 때의 모습과 분위기, 그 말씨를 비교적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아함경의 서술은 소박하고 단순하고 솔직하다. 알고 보면 사람의 혼을 일깨우는 가르침이 다 그렇다. 현학적인 논리가 게재되면 거기에는 거짓이나 속임수가 섞이기 쉽다. 우리는 ≪아함경≫과 율장을 통해서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을 부처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자.
○ 감기에 걸려 앓는 부처님[상윳타 니카야(Samyutta-nikaya) 7:13 제파비다(提婆比多), 잡아함경(雜阿含經) 44:4 천경(天敬)].
○ 등이 아파 눕고 싶다고, 지친 성자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부처님[중아함경(中阿含經) 53 유학경(有學經)].
○ 탁발에 나갔지만 얻지 못하고 빈 바리때로 돌아오는 부처님[상윳타 니카야(Samyutta-nikaya) 4:18 단식(團食)].
○ 한 사람의 바라문에게 질책을 당하면서 침묵하는 부처님[상윳타 니카야(Samyutta-nikaya) 7:3 아수라왕(阿修羅王), 잡아함경(雜阿含經) 42:7 아수라염(阿修羅鹽)].
○ 과식하여 헐떡거리면서 찾아온 어떤 왕에게, 항상 양을 알맞게 먹으면 그렇게 고통을 당하지 않고 오래 살게 될 거라고 말하는 부처님[상윳타 니카야S(amyutta-nikaya) 3:13 대식(大食), 잡아함경(雜阿含經) 42:6 1 천식(喘食)].
부처님의 이런 모습은 대승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수록되어 있다. 아무런 꾸밈도 없이 생활하는 부처님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준다. 한 사람의 인간성을 삭제해 가면서 오로지 성스러운 존재로만 추켜세우려는 경향은 초기 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난해한 술어와 장엄한 표현을 구사하여 속스러운 것과 갈라놓으려는 의도 같은 것도 없다. 뒷날 결집된 대승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에 결집된 대승 경전의 거창하고 비현실적인 표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초기 경전의 이같이 소박하고 솔직 단순한 표현을 보고 시시하게 여긴 나머지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았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이나 윤리관으로 볼 때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근본불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