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부장과 나는 수십 번이나 도상 훈련을 했소. 만약의 경우…… 만약의 경우에 대한민국을 장악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이오.」
「만약의 경우라면……?」
「말 그대로 만약의 경우였소. 우리는 이미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한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열두 시간 이내에 신병을 확보해야 할 사람들의 거처와 움직임 따위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소. 모두 합쳐 백 명이 좀 안 되었지.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들만 연행하면 대한민국은 한동안 공백 상태가 되고 마는 거였소. 누가 무슨 짓을 해도 나설 사람이 없었다는 거지.」
「그러나 대중(大衆)이 있지 않습니까?」
「대중? 김대중은 있을지 몰라도 그냥 대중은 없는 거요. 대중이란 늘 선전과 공작에 이용당하는 존재들 아니오.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148~149쪽)
「‘김학호, 시작해’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세상은 달라졌을 거요. 우리는 혁명을 할 수 있었던 거요. 당시 부장이나 나나 부마사태를 보면서, 그 절규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더상은 안 된다고 생각했지. 김재규 부장이, 나 김학호가 차지철처럼 아양만 떠는 애완견이었을 것 같소? 우리의 가슴은 뜨거웠소. 한평생 조국을 위해 일해왔다는 신념이 있었단 말이오. 나 김학호, 40년을 방첩대·보안대·정보부의 최고 핵심직으로만 돌았지만 부정하지 않았소. 축재하지도 않았소. 아무 놈 모가지만 비틀어도 하룻밤에 몇 억은 나오던 시절이었지만, 이 김학호 그런 짓 한 번도 안 했소. 나는 평생 동안 죽일 놈 죽이고 살릴 놈 살렸소. 그런데 유신 독재가 이대로 더 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오기 시작했던 거요. 그 도상 훈련에는 그러한 우리의 신념이 깃들어 있었던 거요.」
(149~150쪽)
「미국 정부의 어떤 공무원도 다른 나라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게 뭐지? 」
「레이건 대통령의 특별 명령이야.」
「무슨 의미지?」
「공작을 금지하는 거야.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런 해괴한 특별 명령을 내렸어. 이걸 보니까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어째서?」
「보다시피 미국 정부는 타국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거잖아?」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이런 것을 굳이 선포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 전혀 선포할 필요가 없지. 그런데도 선포했다면 왜 그랬겠어?」
「그전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방증?」
「맞아. 하지만 이 특별 명령은 이미 76년에 포드 대통령에 의해서 선포되었다는 게 수수께끼야.」
「그게 무슨 얘기야?」
「미국 정부는 이처럼 부끄러운 명령을 똑같은 내용으로 두 번이나 선포했거든. 이미 포드가 선포했던 것을 레이건이 다시 한 거지. 그렇다면 그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얘기 아닐까? 즉, 포드에서 카터를 거쳐 레이건으로 정권이 바뀌는 사이에 미국 정부가 타국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거나…….」
경훈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한 문장에서 의외로 강렬한 힘을 느꼈다.
「두 개의 명령 사이에 일어났던 전세계의 지도자 암살에 관한 조사를 해보았어. 단 한 사람뿐이었어.」
「누구지?」
경훈은 떠오르는 예감을 누르며 물었다.
「누구였겠어?」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수연은 잘라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그게 정말이야?」
「그래, 오직 박 대통령만이 그 기간에 죽임을 당한 외국의 원수였어.」
(434~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