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평면표지(2D 앞표지)
입체표지(3D 표지)
2D 뒤표지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쇠락하는 산업도시와 한국 경제에 켜진 경고등


  • ISBN-13
    979-11-93528-05-1 (03300)
  • 출판사 / 임프린트
    부키 / 부키
  • 정가
    19,8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4-03-28
  • 출간상태
    출간 예정
  • 저자
    양승훈
  • 번역
    -
  • 메인주제어
    제조산업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제조산업 #제조업 #산업도시 #울산 #제조업 위기 #귀족노조 #사내하청 #산업가부장제 #지방소멸 #메가시티
  • 도서유형
    종이책, 무선제본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47 * 219 mm, 432 Page

책소개

대표적 산업도시 울산에 관한 종합 보고서이자 

제조업의 현실과 성장 동력을 잃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한 날카로운 고찰!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 지역내총생산 전국 1위의 부자 도시, 중산층 노동자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도시. 지난 60여 년간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도시가 바로 울산이다.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제조업 위기론 속 울산이 직면한 딜레마에서 출발해 4차 산업혁명과 기후 위기라는 퍼펙트 스톰을 마주한 주식회사 대한민국호의 앞날을 논쟁적으로 살펴보는 대담한 기획이다. 

2019년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로 ‘조선소 출신 산업사회학자’로 주목받으며 한국사회학회 학술상과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을 수상한 양승훈의 5년 만의 신작. 화두는 울산-제조업-대한민국으로 확장되었고, 이로써 치열한 논쟁의 장이 열리길 희망한다.

목차

프롤로그: 산업도시 울산, 어디로 가는가

1부 울산은 어떻게 산업 수도가 되었나

1장 산업도시 울산, 기로에 서다

2장 미라클 울산, 울산 산업 60년 약사

2부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 박동이 꺼져 간다

3장 한국 경제의 특수성과 제조업

4장 제조업 발전의 중심에서 말단 생산기지로 추락하는 울산

5장 울산 노동자가 국민의 눈에서 사라진 이유

6장 정규직을 뽑지 않는 엔지니어의 공장

7장 생산성 동맹의 파열, 하청 구조로 연명하는 울산

3부 산업 가부장제의 그림자와 중산층의 꿈

8장 청년이 떠나는 생산도시

9장 생산 도시를 기피하는 여성

10장 노동자 중산층 사회의 꿈은 폐기해도 좋은가

4부 산업도시와 대한민국의 미래

11장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 두 도시 이야기 

12장 RE100과 굴뚝 산업의 미래 

13장 메가시티론, 무엇이 문제인가 

14장 생산도시와 대한민국의 미래

에필로그: 다시, 산업도시 울산의 꿈을 위하여

부록: 연구조사 방법론 및 연구 참여자

감사의 말

본문인용

울산을 향한 질문은 결국 1970년대 형성해 놓은 중화학공업 위주의 수출주도 산업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는 불안을 담고 있다. 혁신이나 기술경제학 연구자들은 습관처럼 ‘추격형 경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제조업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일본의 생산 하청기지로 출발해서 불하받은 부품과 완제품을 분해하고 결합하며 모방했고,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엔지니어들의 지도하에 도면을 베끼고 개선해 나가면서 성장했다. 더불어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기보다는 독일이나 일본의 로봇이나 NC 선반 가공 같은 장비로 생산성을 높이면서 세계 최고의 제조업 생산성을 확보했다. 그 사이 유럽은 장비와 노동력이 노후화됐고 미국은 제조업을 등한시했으며 일본은 불황 속에서 설비투자의 여력이 없었다. - 9쪽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1위의 부자 도시, 중산층 노동자 도시 등이 울산을 수식하는 말이다. 울산은 이른바 ‘3대 산업’으로 불리는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이 확고하게 자리 잡으며 각각의 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또 동남권(부산·울산·경남) 제조업의 축이자 포항으로부터 동해안을 타고 내려가 남해안을 지나 여수까지 이어지는 남동임해공업지역의 중심 지역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몇 년 지나서 2030년이 된다면 울산의 모습은 어떻게 기록될까? 부자 도시, 노동자 도시, 산업 수도라는 말이 그때도 통할까? - 20쪽

 

정부의 공식 기록을 볼 때 산업도시 울산의 시작은 1962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산업화 이후 60년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10대 교역량을 자랑하는 ‘30-50 클럽 국가’*(일인당 GDP 3만 달러, 인구 수 5000만 명)에 도달하는 동안 울산은 6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 45쪽

 

이처럼 울산은 이케다에 의해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 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서 설계됐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 48쪽

 

여기서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보는 세 번째 시각이 도출된다. 즉 중공업 안팎의 여러 사람이 이루어 낸 성공이라는 견해다. 이역만리 스코틀랜드까지 찾아가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혀 오고, 일본에 건너가 도면 작성법과 설계 기술을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인 엔지니어들에게 묻고 되묻고 다시 확인한 이들의 공로다. 유럽식과 일본식 선박 건조 기술을 혼합해서 그 나름의 현대중공업 스타일의 건조 기술로 창안해 낸 엔지니어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뜻이다. 또 고소(높은 곳) 작업에 꼭 필요한 발판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현장에서 밧줄에 몸을 의지하여 작업했던 노동자들의 헌신도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일할 곳을 찾아야만 했던 1970~1990년대의 젊은이들이 현대중공업의 성공을 일궈 낸 또 하나의 힘이었다. - 64쪽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울산의 역사를 미라클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과 필연, 기획자와 실행자 모두의 노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석유 비축을 위한 기지로 출발해, 그 밑천으로 정유 공장을 짓기 위해 군사정부와 기업가들의 고려로 공업센터로 지정됐다. 눈이 밝은 정부의 기술관료가 중화학 요충지로 울산을 꼽았다. 그렇지만 그걸 실제로 실행했던 1970년대의 모험 자본가 정주영의 현대가 있었고, 잠을 설치면서 눈썰미를 가지고 도면과 기술을 베껴 오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안전 요건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배를 짓고 자동차를 만들어 냈던 울산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만화 《드래곤볼》의 원기옥처럼 모두의 정성이 모여 노동자 도시이자 부자 동네 울산의 기적을 써낸 것이다. - 69쪽

 

한국은 제조업으로 지탱되는 국가다. 국가 이미지나 숫자로도 바로 드러난다. OECD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은 국민총생산 (GDP)의 27.1퍼센트를 제조업을 통해 벌었는데, 한국보다 GDP 중 제 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는 아일랜드(36.6퍼센트)밖에 없다. 고용 면에서 보면 그 특징이 더 도드라진다.1 세계은행의 산업별 고용률 자료를 참고해 보면, 2019년 기준 한국은 총 고용에서 제조업이 25퍼센트를 담당한다.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으로 OECD 국가 중에서 한국보다 제조업 고용 비중이 더 높은 나라는 독일(27퍼센트)이나 이탈리아(26퍼센트) 정도다. - 74쪽

 

사실 불황기에는 세계 많은 산업도시가 쇠락을 경험했다. 영국 북잉글랜드의 맨체스터와 리버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미국 북부의 러스트 벨트Rust Belt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산업도시 대부분이 위기 상황에서 쇠락하며 왕년의 영화를 쉽게 되찾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일본의 이마바리나 기타큐슈 같은 산업도시에서 왜 이주 노동자와 노인만 생산직으로 고용하면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을까? 울산의 제조업 내 위상이 바뀌고 다수의 정규 생산직이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더는 정규직을 뽑지 않는 상황이라면, 울산의 3대 산업 현장과 도시는 어떠한 운명을 맞게 될까? 더불어 산업도시가 하청 생산기지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수출 제조업에 의존하는 제조업 국가 대한민국은 문제가 없을까? - 85쪽

 

울산이 담당하는 3대 산업의 ‘두뇌’, 즉 구상 기능을 담당하는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가 대부분 수도권으로 이전했고 나머지 부분도 상경을 기다리고 있다. 더 우수한 두뇌를 얻기 위해서다. 이제 울산은 산업도시에서 생산기지로 추락하는 중이다. 심지어 ‘몸통’ 즉 실행 기능을 하는 공장마저 새로 지을 경우 입지로 수도권을 고려한다. - 88쪽

 

미국은 엔지니어를 생산직과 완전히 분리해서 회사의 경영 방침을 현장에 실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자동화, 로봇의 설치, 동선 설계 등 생산방식 실험을 엔지니어가 독립적으로 수행한다. 따라서 대졸 엔지니어가 하는 일과 고졸 생산직이 하는 일이 겹치지 않는다. 독일은 엔지니어의 경우에도 생산직처럼 도제 과정을 통해 육성된 비중이 적지 않다. 또 생산직 중에도 대학에 진학해 공학을 공부하고 엔지니어가 되는 경우도 많다. 결국 서로 현장 경험과 공학 지식을 공유하는 일이 적지 않고, 많은 일이 협의로 진행되는 경우가 흔하다. 일본과 독일이 생산직 노동자와 엔지니어의 괴리감을 줄이기 위한 제도와 정치가 발달한 편이라면, 미국이 반대편에 서 있는 셈이다. 한국식 생산방식은 일본이나 독일과 유사하게 애초 고졸 엔지니어도 많았고, 생산직과 엔지니어의 협업이 많았던 작업장의 역사가 있다. 하지만 1987년 이후 노사관계가 적대적으로 변함에 따라 사측이 미국식 경영 방식을 적용해 오고 있다. 자동화와 로봇 도입을 밀어붙이고 생산 현장에서 가능하면 노동자의 숙련에 기반을 둔 개입을 줄이는 방향으로 애썼다. - 95쪽

 

아버지들이 싸움으로 쟁취한 ‘노동 계급 중산층’은 한 세대로 끝날 위기에 처했다. 노동 계급 중산층이 되기 위한 입장권인 정규직 생산직의 문이 닫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용 절벽’은 숙련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줄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는 생산직 노동자의 숙련에 기대지 않는 생산방식이 자리 잡았다는 데 기인한다. 산업도시 울산의 재생산 문제를 묻기 위해서도, 정규직 생산직 신규 채용에 대해 묻기 위해서도, 정규직 생산직 노동자가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현대자동차의 생산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 150쪽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포스코의 사례를 함께 살펴보면 노사 관계가 어떠한 역사적 궤적을 거치며 형성됐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생산성 동맹은 노사관계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가능하다. 포스코의 생산성 동맹은 노사관계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이나 복지뿐 아니라 생산성 관점에서 노동자의 숙련 형성 자체가 영향받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노사관계의 신뢰는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노사 분규와 갈등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다. 생산성 동맹은 노사관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좀 더 넓게 보면 국가가 노사관계에 어떠한 방식의 인센티브를 주거나 강제하는지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 187쪽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있는 울산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일단 가장 큰 부가가치를 만드는 3대 산업에서 정규직을 거의 뽑지 않으니 청년은 울산의 공장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아버지 세대의 고임금과 복리 후생을 경험한 청년 세대는 현재의 비정규직 하청 노동을 감내하기 힘들다. 덩달아 정규직에 기초한 노동자 가족의 남성 생계 부양자 경제가 작동하지 않으면 여성도 지역을 떠난다. 지역의 인구가 줄고 특히 청년 인구가 줄어드니 도시의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 191쪽

 

산업 가부장제라는 말은 낯선 말이고, 기존의 가부장제와는 좀 다른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산업 가부장제는 특정 산업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불균등한 성별 분업 구조가 만들어 내는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한편에서는 전통적 가부장제가 여성의 고학력화와 화이트칼라 및 전문직 노동 시장 참여를 통한 ‘맞벌이 모델’로 무너지고 있다. 그에 비해 앞서 설명한 공간 분업과 국가의 공간 계획으로 조성된 산업지구에 역사적으로 누적된 가부장제가 바로 산업 가부장제라 할 수 있다. - 206쪽

 

1998년 이후 한국 사회는 가정경제의 표준이 ‘외벌이’(1인 남성 생계 부양자 경제)에서 ‘맞벌이’로 급속히 전환됐다. 엄밀하게 표현하면 외벌이 남성 생계 부양자 경제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1998년 IMF 전환기까지 잠시 ‘환상’처럼 떠올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IMF 이후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사회로 나왔다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도 여성은 ‘야쿠르트 아줌마’부터 시작한 각종 방문판매원이나 미싱사 같은 다양한 경공업 노동을 전업과 부업의 형태로 수행해 왔다. (…) 노동사회학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다양한 서비스 산업과 비공식 경제, 그리고 경공업 근처 외부 노동 시장을 계속 맴돌았던 것이 해방 이후 대다수 한국 여성의 노동 경험이었다. - 255쪽

 

영국의 노동 계급은 1970~1980년대 극심했던 노사 간 ‘계급 전쟁’과 영국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 상황에서 와해됐다. 영국의 노동자는 숙련을 그들만의 노하우로 묶어 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산업 발전에 맞춰 ‘진화’해 나가는 데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산업의 중심이 제조업 생산보다는 런던의 엔지니어링과 바이오기술, 시티The City의 금융 산업 위주로 이동하면서 국가 내에서의 위상도 떨어졌다.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계 산업, 조선 산업, 철강 산업 등이 모조리 어려움에 처하고 점차 축소됐다. 결국 노동 계급 중산층 모델이 붕괴했다. - 281쪽

 

기후 위기가 울산 3대 산업에 기회가 됐지만 산업 고도화와 신사업 진출의 전망을 열어 주지 않고 있다. 친환경 전기차와 수소경제는 현대자동차에 기회를 주지만 울산의 자동차 부품 생태계는 이에 대응하기에 취약한 상태이고 개선책도 뚜렷하지 않다. 자동차 부품 업계가 고용하는 5만 개의 일자리는 곧 위기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탈탄소 전환을 요구하는 IMO의 규제는 조선 업계에 선박 수주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고착된 노동 시장 이중 구조로 인한 원하청 간 임금 격차와 불황기의 임금 하락 문제를 풀지 못하면서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친환경 자동차 생태계에 필요한 정밀화학의 전환 역시 정책 역량과 기존 석유화학 산업의 보수성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 345쪽

 

국가의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동남권 메가시티 프로젝트가 다시 진행돼 광역 간 지역 정치의 기회 구조가 열리거나 해오름동맹을 통해 산업도시 연맹으로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더라도 울산이 풀어야 하는 산업 구조상의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울산은 제조업을 영위하는 산업도시의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 양질의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고 우수한 노동력을 어떻게 지켜 내고 육성해야 할까. 국가는 울산과 한국의 제조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울산은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까. - 367쪽

 

산업도시 울산이 고진로 전략을 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도그마를 깨부술 필요가 있다. 먼저 경제 평론을 하는 이들은 한국의 산업 문제를 원가절감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들은 원가를 지나치게 높이면서 생산을 마비시키는 노조 때문에 기업이 해외로 떠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울산의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노조를 등장시키곤 한다. 생산 원가는 올라가는데 생산성이 그만큼 향상되지 않으면 기업이 끊임없는 도전에 노출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웃돈을 주면서 고학력 엔지니어를 영입하고 높은 부동산 비용까지 감당하면서 공장을 수도권으로 진출시키려는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과 그 하청 클러스터의 결정은 이것이 단지 비용의 문제가 아님을 반증한다. 오히려 문제는 좋은 인재가 없다는 것이다. - 376쪽

 

자연스럽게 구축된 노동의 공간 분업을 국가가 정책을 통해 한 단계 더 전개시키고 말았다는 데 있다. 수도권 공장 총량 규제를 풀어 버리고 수도권 인근에 공장이 입지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LG디스플레이(당시 LG필립스)가 파주에 들어서고, SK하이닉스는 이천부터 청주까지 터를 잡았다. 삼성은 수원부터 천안까지 공장을 세웠다. 이때 ‘천안 분계선’이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했다. 천안 이남에는 인재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 394쪽

 

어떻게 하면 새로운 산업도시 울산의 꿈을 다시 꿀 수 있을까? 우선 제조업 클러스터로서 울산의 가치에 대해 충분한 공감대가 필요하다. 제조업 고도화, AI 및 ICT 연계를 통한 4차 산업혁명 모두 울산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기계 분야에서 가장 고도화된 제조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50년간 누적된 숙련과 체화된 기술을 갖춘 전문가가 머물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거제가 어려워지자 동남권이 몸살을 앓았다면, 앞으로 울산의 고용이 무너지고 제조 경쟁력이 사라진다면 동남권뿐 아니라 전국의 제조업이 흔들릴 수 있다. 고용뿐 아니라 산업 생태계의 공급망과 가치사슬 차원에서도 그렇다. 울산을 방치하고 제조업을 논할 수 없다. 

둘째로 국가, 지자체, 대자본, 노동조합 누구도 일방적으로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결국 명확하게 문제를 공유하고 각자의 이해관계를 인정하면서 최소한의 것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협상을 지역 단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410쪽

 

서평

“이 도시를 보라”

대한민국호의 성장 엔진이 꺼져 가는 이유

 

울산, 한반도의 동남쪽 해안가에 위치한 이 공업도시에는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 중산층 노동자 도시’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어 있다. 울산은 지난 60여 년간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산업도시다. 그런데 이 도시에 쇠락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구 115만의 울산은 여전히 외형적으로는 지역내총생산(GRDP) 전국 1위의 부자 도시이고, 수출액 기준으로 경기도와 충청남도에 이어 전국 3위의 광역시이지만, 도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울산은 청년층 신규 고용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장년 노동자, 퇴직자 중심의 늙은 도시가 되었다. 지역 대학은 자동차, 조선, 중화학 등 울산 3대 산업을 뒷받침할 인재 공급처 역할을 못 하고 힘을 잃고 있으며, 기술 혁신의 주역인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는 일찌감치 천안 이북의 수도권으로 떠났다. 또 청년과 여성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인구 감소에 직면했다. 4차 산업혁명, 기후 위기, 그린뉴딜이라는 퍼펙트 스톰이 몰려오는데, 전통 제조업을 가진 울산이 어떤 대책과 해법을 찾아야 할지 지자체, 지역 주민, 대기업, 하청과 부품 업체의 이해관계가 저마다 다르다. 

 

기후 위기가 울산 3대 산업에 기회가 됐지만 산업 고도화와 신사업 진출의 전망을 열어 주지 않고 있다. 친환경 전기차와 수소경제는 현대자동차에 기회를 주지만 울산의 자동차 부품 생태계는 이에 대응하기에 취약한 상태이고 개선책도 뚜렷하지 않다. 자동차 부품 업계가 고용하는 5만 개의 일자리는 곧 위기에 노출될 공산이 크다. 탈탄소 전환을 요구하는 IMO의 규제는 조선 업계에 선박 수주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고착된 노동 시장 이중 구조로 인한 원하청 간 임금 격차와 불황기의 임금 하락 문제를 풀지 못하면서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친환경 자동차 생태계에 필요한 정밀화학의 전환 역시 정책 역량과 기존 석유화학 산업의 보수성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345쪽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대한민국 산업 수도’ 울산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며 미래를 모색하는 책이다. 울산의 산업 구조와 노동 시장, 사회적 관계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목적은 제조업과 수출을 기둥으로 성장해 온 한국 경제에 닥친 위기의 본질을 살피고 종합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울산이라는 대표적 산업도시에 관한 종합 보고서인 동시에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저물어 가는 산업’으로 치부되는 제조업의 현실과 성장 동력을 잃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한 고찰이다.

저자 양승훈은 2019년 조선소에서 5년간 일하며 관찰했던 경험을 토대로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 산업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내놓았다. 이 책으로 산업 현장의 경험을 겸비한 ‘조선소 출신 산업 사회학자’로 주목받았고, 이듬해 한국사회학회 학술상과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5년 만에 출간하는 이번 책은 거제에서 울산으로, 울산에서 대한민국으로 논의를 확장했다. 이는 단순히 공간 지리적인 확장에 그치지 않는다. 제조업 국가 한국이 현재 직면한 곤혹스러운 질문을 에두르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미라클 울산,

모두의 정성과 노력이 모인 ‘좋았던’ 시절

 

책의 1부는 울산이 그간 어떻게 산업 수도로 급부상했는지, 울산의 60년간 산업 역사를 돌아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1962년 1월 13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같은 달 27일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공포했다. 2월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했다. 6월엔 울산군 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 두왕리, 범서면 무거리와 다운리, 농소면 송정리와 화봉리를 통합해 울산시 승격을 발표했다. 이후 뒤에서 다룰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진출하여 지금의 울산 3대 산업을 구성했다. 이러한 서사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산업도시 울산의 형성이 박정희와 현대그룹이 이룬 성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근대적 산업도시 울산은 일제 강점기 혹은 그 이전부터 누적된 경로 의존과 다양한 우여곡절 속에서 탄생했다. 산업도시 울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케다 스케타다라는 인물과 제국주의 일본의 대단위 병참기지 건설 계획을 만나게 된다.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 산업도시 울산을 구상하도록 했던 선구자는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라는 사람이다. 이케다는 부산 지역에서 1920~1930년대 개발 사업을 했던 인물이다. 헌병 중사 출신이라는 특별하지 않은 이력에도 동양척식회사와 정군관政軍官계와의 인연으로 빠르게 사업의 규모를 확장했다. (…) 1942년 12월, 울산개발계획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최종적으로 허가받았다. 1943년 5월 11일, 지금의 학성공원에서 기공식이 거행됐다. 이처럼 울산은 이케다에 의해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 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서 설계됐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 이케다 스케타다의 산업도시 계획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70퍼센트 완공 단계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일제가 구상했던 석유 비축기지이자 정유 공장의 흔적은 결국 산업도시 울산의 경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 48쪽

 

1962년 대한석유공사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울산 정유 공장의 복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어 1970년대에는 현대중공업의 조선소 설립이 이루어지는데, 정주영 회장이 1970년 12월 그리스 리바노스사로부터 유조선 2척 선박 수주를 먼저 따내고, 부지 조성(1971년 4월), 조선소 기공식(1972년 3월)이 그 뒤에 진행된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현대자동차의 울산공장 준공은 이보다 뒤인 1975년의 일이다. 수출주도 산업인 울산의 3대 산업은 1990년대에 들어 큰 호황을 맞는다. 조선 산업은 10년 초호황기 슈퍼사이클에 들어섰고 현대자동차는 2000년대에 오면서 ‘생산량 기준 글로벌 Top 5’로 올라섰다. 이후 2017년 서울에 1위를 빼앗기기 전까지 울산은 근 20년 동안 한국에서 일인당 GRDP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울산의 호시절이었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울산의 역사를 미라클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과 필연, 기획자와 실행자 모두의 노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석유 비축을 위한 기지로 출발해, 그 밑천으로 정유 공장을 짓기 위해 군사정부와 기업가들의 고려로 공업센터로 지정됐다. 눈이 밝은 정부의 기술관료가 중화학 요충지로 울산을 꼽았다. 그렇지만 그걸 실제로 실행했던 1970년대의 모험 자본가 정주영의 현대가 있었고, 잠을 설치면서 눈썰미를 가지고 도면과 기술을 베껴 오던 엔지니어들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안전 요건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배를 짓고 자동차를 만들어 냈던 울산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만화 《드래곤볼》의 원기옥처럼 모두의 정성이 모여 노동자 도시이자 부자 동네 울산의 기적을 써낸 것이다. - 68쪽

 

지식 기반 경제 시대의 도래, 

제조업 강국의 깃발은 내려도 좋은 것일까

 

울산의 위기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호황의 한복판을 거치며 내부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석유화학 산업은 국제 수급 사이클이 바뀔 때마다 수익이 출렁였고, 자동차는 1998년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 충돌을 비롯해 크고 작은 분규에 휩싸였으며, 호황기가 끝난 조선 산업은 2010년대에 들어서 구조조정에 직면했다. 이를 전후로 제조업 전반에 대한 위기감이 우리 사회에 퍼져 나갔다. 

이 책의 2부는 울산과 한국 경제가 처한 제조업 위기론의 심층 분석이다. ‘제조업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으니 지식 기반 경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진단은 과연 적절하고 타당한가? 이제 한국은 제조업 강국의 깃발을 내려도 괜찮은 시점일까? 울산과 같은 산업도시의 쇠퇴를 방치하고서도 한국은 기후 위기와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퍼펙트 스톰’을 뚫고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아갈 수 있을까? 

이런 무거운 질문에 대해 우선 저자는 한국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부터 다시 환기시킨다. 한국은 제조업으로 지탱되는 국가다. 제조업 세계 5대 강국일 뿐 아니라 국민총생산의 27.1퍼센트를 제조업을 통해 번다(2020년 기준). GDP 중 제조업 비중이 한국보다 높은 국가는 아일랜드밖에 없다. 고용 관점에서 보아도 한국은 총 고용에서 제조업의 비중이 25퍼센트로 OECD 국가 중 독일(27%)과 이탈리아(26%) 다음이다(2019년 기준). 

 

서울이나 분당, 일산 같은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공장이 어디에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지천이 공업 지대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수원, 평택으로 시작하는 산업 벨트가 나온다. 수도권의 상습 정체 구간으로 악명 높은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독산, 소하, 시흥, 안양 모두가 공단 지역이다. 4호선 도시철도를 타고 남쪽으로 평촌만 지나면 곧 군포산업단지나 안산의 반월국가산업단지까지 공단 지대가 펼쳐진다. 1호선 경인선을 탄다면? 서울만 빠져나가면 부천에 거대한 산단이 있고, 인천에 도착하면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길에 쏟아져 나오는 남동공단과 부평 GM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 74쪽

 

더 중요한 것은 기술 혁신이 산업 현장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저자는 한국의 성장 동력이었던 제조업을 방치하고서 기술 혁신을 논하는 허망함을 경계한다. ‘제조업의 위기’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되풀이되는 ‘탈추격 혁신 담론’만 봐도 그렇다. 이 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산업화 초부터 당시의 제조 선진국인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도면을 베끼거나 완제품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원리를 익히는 역설계 방식으로 기술을 따라잡으며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런데 한국의 제조업이 기본설계 역량이나 원천 기술이 없다 보니 여전히 양산을 위한 사고나 소재·부품·장비(일명 소부장) 하도급 업체를 쥐어짜는 방식으로만 산업을 영위하여 혁신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대로라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제조 선진국의 원천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고 중국을 위시한 개발도상국의 저렴한 원가 경쟁에 쫓기는 샌드위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의적인 ‘최초의 질문’을 갖고 기본설계를 해내면서 ‘빠른 추격자fast-follower’에서 ‘최초의 선도자first mover’로 변화해야 한다는 충고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변하라’는 일견 공자님 말씀처럼 지당해 보이는 이 담론 역시 생각보다 현실성이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요컨대 경제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제조업 경쟁력이나 혁신 문제에서 생산 과정, 산업과 기업 간 연결망,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제조업의 중요성을 결합해서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등의 제조 대기업은 ‘최초의 질문’과 함께 세계 시장에서 이미 ‘최초의 선도자’ 위치에 서 있다. 당연히 기본설계도 수행할 수 있다. 심지어 최초의 선도자 기업에 소부장을 제공하는 기업들 중 1차 협력 업체의 역량도 점차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연구개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한민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도 세계 1등이다. 제조 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에서 그들의 경쟁력 자체는 문제없으므로 문제제기의 방향이 틀릴 때가 많다. - 80쪽

 

R&D 투자율 1위 국가인 한국이 20년이 다 가도록 앵무새처럼 혁신과 선도 담론만 되뇌며 여전히 위기론을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 문제를 내부 구조에서부터 파악해야 한다. 울산-제조업-대한민국은 세포-조직-인체처럼 상호 유기적 관계망 속에서 파악해야 비로소 총체적 진단이 가능하다. 이것이 울산을 제조업이나 한국 경제 전반과의 산업 연관관계 및 공간 지리적 분업 구조를 통해 살펴보는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울산의 딜레마,

공간 분업과 생산성 동맹의 와해

 

산업 현장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관찰하면 울산과 한국 제조업이 위기에 빠진 여러 원인이 있지만 저자는 이를 크게 ‘노동의 공간 분업과 생산성 동맹의 와해’로 압축한다.

 

그런데 1990년대를 지나면서 두 가지 층위에서 구상과 실행의 지리적 분리를 추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선 제조 대기업은 적대적 노사관계 때문에 파업이나 다양한 쟁의에서도 생산량과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의 숙련에 의존하지 않는 체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5장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1987년 이후 노사관계가 적대적으로 흐르면서 기업은 노동자와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협업하기보다,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노동자와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생산방식을 채택했다. (…) 현대자동차는 점차 IT 기반 공정 관리 기술과 NC가공 기계 도입을 극대화하여 자동화를 촉진시키고 로봇 도입을 진행했다. 노동자가 반복 작업을 덜 맡아 개개인은 편했지만 현장에서 노동자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른바 ‘숙련 절약형 혁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 101쪽

 

‘공간 분업’은 산업혁명 중심지였던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관찰된다. 일례로 근대 방직 산업과 기계 산업의 메카였던 영국 맨체스터 지역에는 원래 공장과 설계실이 함께 있었지만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본사와 설계실이 분리되어 금융과 정치의 중심인 런던으로 향했다. 1970~1980년대의 불황과 마거릿 대처 시절의 강경한 노조 정책을 거치며 맨체스터의 공장은 점차 쇠퇴했고 본사에서는 생산 거점을 인건비가 싼 아시아나 아프리카, 인도 등으로 옮겼다. 런던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는 전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오직 최적의 이윤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구상을 세웠으나 모공장인 맨체스터 공장은 그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와 유사한 일이 시차를 두고 울산에서도 재현되었다. 더구나 그 근저에는 노사의 뿌리 깊은 상호 불신이 자리 잡았다. 요컨대 미라클 울산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기업인, 관료, 엔지니어, 노동자, 지역민들 간 ‘생산성 동맹’이 와해된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자동차, 좀 더 넓게는 한국의 제조 업체는 II 유형으로 생산방식이 구성됐다. 노사 간 극도의 불신이 생산직을 배제한 채 엔지니어링에 기반을 둔 혁신을 강제한 것이다. 요컨대 모듈화, 자동화, 정보통신기술의 도입 등이 노동자를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됐다. 모듈화를 통해 싼 하청 업체의 노동력으로 인건비를 절감하고, 자동화를 통해 노동자의 숙련을 높이기보다는 단조로운 작업 커뮤니케이션만 높이는 방식으로 생산기술의 혁신이 주도된 것이다. - 161쪽

 

수 차례의 강도 높은 노사 대결은 양측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기며 결과적으로 담합적 노사관계를 형성했다. 이 담합으로 울산의 대기업 노조는 높은 임금과 복리후생, 고용 안정을 얻었지만 미래 자녀 세대의 신규 고용을 잃었고, 회사는 분규를 줄였지만 노동자를 생산성 향상 파트너에서 배제하는 기조를 본격화했다. 언제부터인가 대기업 노조가 국민의 신망을 잃기 시작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울산 노동자들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할 때나, 그 이후 1991년 골리앗 투쟁을 할 때만 해도 회사와 정부와 보수언론이 비난하더라도 노동자를 지지하는 우군이 사회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지나면서 현대자동차를 위시한 울산 대기업 노동자의 파업에 더 이상 연대의 시선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 126쪽

 

결과적으로 2000년대 들어 울산의 노사는 각자의 입장에서 분주히 살길을 찾았으나 그 결과로 남은 것은 생산성 동맹의 와해와 치열한 각자도생의 싸움뿐이다. 영국 맨체스터가 겪었던 쇠락의 길을 울산이 답습하고 있는 셈이다.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

기후 위기와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까지

 

그렇다면 울산과 한국 제조업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공간 분업과 생산성 동맹 와해, 인구 감소라는 삼중고 트릴레마 속에 영국의 맨체스터나 글래스고, 스웨덴 말뫼 등의 도시가 걸었던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는 해외의 여러 선발 사례들을 검토한다. 세계 최대 자동차 도시였던 디트로이트와 1970년대까지 철강 도시로 명성을 떨치던 도시 피츠버그의 사례는 흥미롭다. 

GM(제너럴 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까지 3개 자동차 회사가 있었던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에 인구 15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1970년대부터 일본 자동차에 밀려 고전하다가 2009년 GM의 파산까지 겪으며 쇠락했다. 피츠버그는 철강 산업 패권을 일본(일본제철)과 한국(포스코)에게 차례로 넘겨주게 되자 1985년 기업, 시 정부, 대학 등이 함께 참여해 산업의 다각화를 위한 보고서 ‘전략 21’을 제출하고 기업의 본사와 금융, 보건 의료와 교육, 첨단 연구개발 중심지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채택했다. 덕택에 생산직 일자리 대신에 서비스 산업과 하이테크 부문의 일자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시 재활성화를 40년가량 진행한 지금 피츠버그의 인구는 감소했고, 도시 전체 관점에서 인종 분리와 소득 격차는 더욱 심해졌으며, ‘노동 계급 중산층’ 모델의 해체를 막지 못했다. 반면에 디트로이트는 지금도 생산직 비율이 20퍼센트를 넘길 정도로 노동자의 기존 일자리를 지켜냈다. 하지만 세수 감소로 도시 재개발과 적절한 재구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도심이 슬럼화됐다.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의 사례가 울산에 주는 함의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주력 제조업의 위기 상황을 전환의 관점에서 적극 대응하지 않을 경우 도시 자체가 쇠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기지로서의 입지가 약화되는 상황일 때 재정 문제를 겪으면서 적극적으로 도시 전환에 나서지 못하고 슬럼화와 인구 유출을 겪게 됐다. 다른 하나는 도시를 고도화하더라도 단단한 중산층을 육성할 수 있는 제조업 일자리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이다. (…) 3대 산업이 여전히 건재한 울산에서는 울산의 현 위치에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즉 세계 1위 조선소, 세계 최대 규모의 양산이 가능한 자동차 공장, 여전히 견고한 석유화학 콤비나트가 만들어 내는 역동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304쪽

 

저자는 해외 선발 산업도시의 과거 사례를 넘어 앞으로 다가올 RE100, 수소경제, 기후 위기 등 새로운 글로벌 환경 변화가 울산 3대 산업과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력을 폭넓게 검토한다. 국토 균형발전의 관점에서 부산, 울산, 경남의 3개 광역을 연결하고 통합하여 수도권 쏠림에 대응하자는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 역시 신중하게 필요성을 따져 본다. 이 책의 4부는 이처럼 한국의 산업도시들과 우리나라 제조업의 앞날, 대한민국호의 미래 비전까지 당면한 과제를 시공을 넘나들며 살펴본다. 

맨체스터가 일방적 쇠락,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가 하나를 얻지만 다른 하나를 잃는 저진로 전략이라면 저자는 울산과 한국 산업도시들의 ‘고진로 전략high-road strategy’을 제안한다. 최근 진행되는 미국의 제조업 부활 정책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조업 고용 비중이 1979년 22퍼센트에서 2019년 9퍼센트까지 하락한 미국은 정리해고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숙련 노동자가 현장을 떠나면서 생산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기업은 그럴수록 노동자를 훈련시키기보다는 자동화 설비 등 생산 기술에 대한 투자를 늘려 해결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었고 산업도시가 모인 중서부 러스트 벨트는 노동자 정리해고와 공장 철수로 황폐화되었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은 제조업을 부활시키며 첨단 산업의 성과를 연계시키는 전략으로 기조를 바꾸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 및 학계는 ‘제조업 재활성화Remaking America, Revitalization of the US manufacturing’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정책을 진행했다. 해외로 나간 공장을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며 국내로 복귀시키는 리쇼어링reshoring도 시작했다. 제조업의 중요성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조업은 가장 많은 이들에게 고임금을 제공할 수 있는 산업이고, 소수 민족과 저소득층으로 하여금 사회적 계층 상승(이동성)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안정적 산업이다. (…) 더불어 첨단 산업에 기대하는 혁신 역시 제조업의 연구개발과 생산 과정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 373쪽

 

울산의 고진로 전략은 먼저 울산이 가진 현재의 산업, 기술적 역량을 면밀하게 재평가하여 지속 가능한 제조업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것이 바탕이다. 고진로 전략은 생산성 동맹의 복원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노동자는 높은 임금과 복리후생을 보장받고, 기업은 생산성과 혁신 역량을 보장받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을 둔 산업 전략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본과 노동 차원을 넘는 지역과 정부의 역할도 요구된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 연구와 생산의 분리라는 공간 분업의 문제를 국토 균형 발전 및 제조업 부흥의 관점에서 정부와 지자체가 재검토하고 지원책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 이해관계를 넘어 정부와 지자체, 대자본과 노동조합 등 모든 주체가 국가의 미래와 산업 전망을 함께 논의하는 정치적 거버넌스의 형성이 필수이다. 

 

21세기 기후 위기·4차 산업혁명이라는 글로벌 수준의 전환과 저출생 고령화 및 지역 소멸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 미증유의 재생산 위기 속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제조업·에너지·국토계획의 전환에 대한 열린 토론의 장이 펼쳐지길 희망한다. - 417쪽

 

노동자 중산층의 꿈과 산업 가부장제의 그늘,

청년이 희망을 잃는 도시 혹은 나라에 대한 진단

 

워낙 방대한 주제와 첨예한 논쟁거리를 가득 담은 책이기에 보도자료에서는 주로 산업사회학, 노동사회학적 논의에 초점을 두고 소개했지만,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젠더, 계층 이동 사다리, 지방 소멸 등 정통 사회학 고유의 주제를 중심으로 읽어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시한다. 사회적 갈등은 구체적인 역사와 경로, 살아 숨쉬는 이해당사자들의 대립에서 발생하는데 이 구체성을 선명히 부각시킨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한 예로 책에서 울산 쇠퇴의 한 이유이자 지난 고도 성장 시대의 그늘로 지적하는 ‘산업 가부장제’의 문제를 살펴보자. 산업 가부장제는 특정 산업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서의 불균등한 성별 분업 구조가 만들어 내는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울산은 생산직 노동자 외벌이로도 중산층 수준의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노동자 중산층’의 꿈을 실현한 도시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 경로에서 울산은 산업 가부장인 아버지들의 일자리는 지켰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녀들이 들어갈 일자리는 사라졌으며, 최근 10년간 여성 고용률은 전국 최저 수준을 맴돌았다. 일반적인 가부장제의 기준으로 볼 때 보수 정서가 강하다는 대구 경북보다 여성의 노동 시장 진입에 더 냉담했던 도시가 울산이다. 많은 공단을 주축으로 짧은 역사 속에 고도성장을 이루며 가정과 사회의 급속한 변화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산업 가부장제에 관한 저자의 논의는 젠더와 계급 계층 갈등에 대해 현실에 기반해 이해하도록 한다. 

대학은 또 어떠한가. 세계적 수준의 3대 산업이 포진한 유리한 환경이지만, 산학연 협동의 모델이 될 수도 있었을 울산의 대학들은 정규직을 뽑지 않는 지역 노동 시장과 거의 대부분의 R&D 연구소가 천안 분계선 너머에 존재하는 현실에서 지방대학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대학을 바탕으로 주 정부의 지원과 벤처 캐피털이 결합해 첨단 산업의 성장을 선도한 실리콘밸리와 극명히 대조되는 사례이다. KTX로 두 시간이면 닿을 좁은 국토 안에서 지방 소멸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청년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여성이 떠나는 도시는 좀 더 의미를 확장해 보면 오늘의 한국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각자는 열심히 달려왔는데 결과적으로 모두가 힘든 현실을 우리는 언제까지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아버지가 젊은 시절 울산 용접공이었고 자신도 대학 졸업 후 조선소에서 일했던 저자는 “평범한 노동자도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사회의 꿈을 포기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울산이라는 한 산업도시에서 출발해 각자도생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실과 과제를 묵직하게 파고드는 이 문제적 저작에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저자소개

저자 : 양승훈
제조업과 산업도시, 기술 혁신과 엔지니어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다. 마산에 소재한 경남대학교에 재직하며 사회조사방법론, 통계학, 데이터사이언스, 디지털 과학기술학을 강의한다. 학부에서 정치학을, 석사 과정에서 문화인류학을, 박사 과정에서 과학기술정책(혁신 연구)을 공부했다. 조선소에서 5년간 근무하며 관찰했던 경험을 담아 산업도시 거제와 조선 산업에 대한 이야기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2019)를 썼고, 이듬해 한국사회학회 학술상과 한국출판문화상 교양 부문을 수상했다. 산업도시 울산을 살펴보며 50년 전 중화학 공업화로 형성된 한국의 주력 제조업과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이 디지털·에너지 전환, 수도권 쏠림을 딛고 생존 가능할지 고민한다. 《추월의 시대》(공저, 2021), 《문턱의 청년들》(공저, 2021)을 함께 썼고 《데이터 과학을 활용한 통계》(2023)를 옮겼다.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