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뭘 하고 지내지?
아무것도 안 해요. 여름이 끝나길 기다리죠.
그럼 겨울에는 뭘 하지?
대답을 떠올리며 미소 짓자 그가 눈치를 챘다. “말하지 마. 여름이 오길 기다리는 거지?”
—16p
내가 푹 빠지면 상대방도 푹 빠진다는 법칙이 어딘가에 있다. Amor ch’a %00;’amato amar perdona,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지옥(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Inferno)〉 편에서 프란체스카는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자. 나는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은 영원히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44p
나는 항상 그를 시야에 두려고 했다. 옆에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옆에 없을 때도 그가 오랫동안 뭘 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도 나하고 있을 때와 똑같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을 때 다른 사람이 되게 하지 마소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여 주게 하지 마소서. 그가 우리 집에서 보내는 삶, 내가 아는 것 이외의 삶을 영위하게 하지 마소서.
내가 그를 잃게 하지 마소서.
그가 내 것도 아니고 옆에 잡아 둘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린애일 뿐이었다.
—55p
그의 한마디에 행복해질 수 있다면 쉽게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불행해지고 싶지 않으면 그런 작은 행복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67p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당신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내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정리할 시간을 벌려는 듯이. 강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알았으면 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당신 말고는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말해 버렸다.
—92~93p
배신자. 그의 방문이 끽 하고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배신자.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가. 어디 안 갈게. 물론 그렇겠지. 거짓말쟁이.
나 역시 배신자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해변 가까이 있는 집에서 오늘 밤 나를 기다리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매일 밤 나를 기다리는데 나는 올리버와 마찬가지로 그녀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121p
“키스해도 돼?” 언덕에서 키스해 놓고 그런 질문이라니! 우리 둘, 지난일은 다 지워 버리고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건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어제 마르지아에게 한 것처럼 그의 입술로 입술을 가져갔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말끔하게 치워 주는 것 같았다. 나이 차이도 나지 않고 그저 두 남자가 키스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이내 녹아 버렸다. 두 남자가 아니라 그저 두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에 평등함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저 나이가 더 적고 더 많은 두 사람이 인간 대 인간, 남자 대 남자, 유대인 대 유대인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야간등도 좋았다. 편안하고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옥스퍼드의 호텔 룸에서 느낀 그대로였다. 진부하고 창백한 내 방의 분위기마저 좋았다. 그의 물건이 여기저기 들어찬 방은 내가 쓸 때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사진, 작은 테이블과 밀어 넣은 의자, 책, 카드, 음악.
—163p
오비디우스의 책에 나오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려고 했다. 거기 복숭아로 변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가. 아니면 내가 지금 만들어 낼 것이다. 복숭아처럼 아름다운 남녀가 아름다움을 시기한 신에 의해 복숭아나무로 변해 버린다. 3000년이 흐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억울하게 빼앗겨 버린 기회를 다시 얻어서 중얼거린다. “네가 멈춘다면 난 죽도록 괴로울 거야. 끝내지 마. 영원히 계속해 줘.” 그 이야기가 너무도 자극적이어서 나는 갑자기 절정의 순간으로 치달았다.
—181p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도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이 되기를, 아들이 얼른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네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있으면 끄지 말고 잔혹하게 대하지 마라. 밤에 잠을 못 이룰 만큼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건 끔찍하지. 타인이 너무 일찍 나를 잊는 것 또한 마찬가지야. 순리를 거슬러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결핍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할 때 줄 것이 별로 없어져 버려. 무엇도 느끼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야!”
—272~273p
우리가 자신을 내던진 그해 여름의 몇 주 동안 우리의 삶은 현실에 맞닿아 있지 않고 강 건너 다른 세계에 있었다. 시간이 멈추고 하늘이 땅에 닿아 태어났을 때부터 우리 것이던 신성한 걸 내어 주는 그곳에.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보았다.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확인되었을 뿐. 우리는 한때 별을 찾았다. 나와 당신. 일생에 한 번만 주어지는 일이다.
—29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