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治水)의 방법을 다루는 사람은 “물이 넘쳐흐르는 곳을 틀어막아라!”라고 하는데, 이는 백곤(伯鯀)이 쓰던 방법이었다. 그리고 백규(白圭; 약 B.C.370~B.C.300)가 이를 답습하였다. 제 한 몸의 안위를 위하여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길·흉, 후회함[悔]·아쉬워함[吝]이 생겨나는 곳을 틀어막아라!”라고 하는데, 이 또한 똑같을 따름이다. _10면
말로써 상(象)을 설명하여서는 서로가 잘 드러날 수 있으니, 그래서 통발과 올무에 비유한 것과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상이 이해될 수 있는 수단이나 말은 본디 잊을 수 없을 따름이다. 물고기는 스스로 물에서 헤엄치며 놀고 토끼는 스스로 산에 굴을 파고 사니, 통발을 설치하지 않고서는 저 물고기가 나의 물고기가 아니고 올무를 설치하지 않고서는 토끼도 나의 토끼가 아니다. 물고기와 토끼가 내가 잡은 나의 토끼가 아니라면, 도(道)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에 있지 않으니, 내 소유가 아닌 존재다. 그러니 어찌 ‘상을 밝혔다’·‘뜻을 이해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은 잊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상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말이 저절로 나옴에 비유하자면, 몸에 기인하고 기(氣)에 기인한다. 또 움직임[動]에 기인하고 마음에 기인하며, 물(物)에 기인하고 이치에 기인한다. 도가 혹시 말에 기인하여 생긴다면, 말·상·뜻·도가 본디 합해져서 구분됨이 없을 터이니, 그러면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_49면
오직 괘와 효를 쪼개서 각기 다른 것들로 여긴다면, “세 성인들께서 마루[宗]를 달리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갈림길이 많아서 양(羊)을 잃어버렸다면, 나중에 오기 위해 더욱 많은 표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문왕께서 만든 후천(後天)의 역이 있고, 복희씨가 만든 선천(先天)의 역이 있다.”라고 말하게도 될 것이다. 하늘도 이렇게 선·후로 쪼개면 도가 각각 달라지거늘, 하물며 성인들에게서야! 이렇게 된다면 복희씨와 문왕이 각자 문호를 열 것이고, 주공과 공자도 각기 붕당을 만들 것이니, 또한 이를 어쩐단 말인가! _140면
이단은 소인들이 빠지는 지름길이다. 장주(莊周)의 ‘우용(寓庸)’이 있기에 호광(胡廣)의 ‘중용(中庸)’이 있는 것이고, 또 장주의 ‘지락(至樂)’이 있기에 풍도(馮道)의 ‘장락(長樂)’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융성함도 한때[時]요, 쇠미함도 한때다. 융성한 덕은 반드시 융성한 때[時]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알아주는 이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지낼 때는 애오라지 이러한 때에 맞는 덕에 편안해야 한다. 옛사람들이 받들던 도(道)에 대해서도 반대로 할 수 있고, 내 마음으로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로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스스로 보존하여 하나의 덕에 의지하며 이룸이 있는데, 남이 어찌 이를 괘념한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_31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