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내가 사는 마을 이름은 ‘꽃드리’이다. 타 지역 사람들은 ‘기지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사는 집 양쪽에는 큰 미군 부대가 두 개나 있다. 밖에서 부대 안을 보면 큰 탱크가 즐비하다. -9쪽
미국에서의 2년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시간이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차별을 받았다. -12쪽
아빠와 같이 살 때는 검은 얼굴이 창피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놀려도 그만이었다. 아빠는 나와 엄마에게 든든한 울타리였다. 미국에서 살 때도 아빠는 엄마와 나를 어떻게든 챙기려고 했다. 오늘은 유독 세 식구가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종일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빠와 비슷한 흑인 미군을 본 오늘 같은 날은 더 했다. -28쪽
나는 기억을 더듬어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잔뜩 묻어 있는 흙먼지를 털어 내니 삐뚤빼뚤 희미한 글씨체가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프리티 루시 사랑해. 아빠가.” -60쪽
아기 나팔과 엄마 나팔처럼 크고 작은 나팔 모양의 나팔꽃이 참 신기했다. 그 나팔꽃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아빠가 생각났다. 기분 좋은 날 보는 나팔꽃은 아빠를 보는 듯 행복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 보는 나팔꽃은 내 가슴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80쪽
엄마를 미워하고, 창피해하는 걸 알고 하나님이 벌을 주나 싶었다. 하나님, 부처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에게 기도했다. -108쪽
네가 떠난 뒤에도 지구는 잘 돌고 있어. 가을이 가고 겨울도 갔어. 봄이 지나고 여름도 가고 다시 가을이 왔는걸. 억울하지 않니? 너 없이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구가 돌아가고 있다니. 그러니까 왜 그랬어. 바보야. 너를 보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운 줄 미리 알았다면 넌 그렇게 선뜻 떠나지 못했을 거야. -198쪽
도이는 이틀이 멀다고 나에게 찾아왔다. 나와 난숙이, 도이는 삼총사가 되었다. 셋이 몰려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키득거렸다. 난숙이는 소담한 얼굴에 통통한 볼살이 매력이다. 짧은 단발머리 때문에 동그란 얼굴이 더 동그랗게 보였다. 도이는 마른 멸치가 생각날 만큼 말랐으니, 둘만 봐도 극과 극이었다. 거기에 곱슬머리에 키가 큰 흑인 여자아이까지 끼어 세 명의 조합은 정말 볼 만했다. 난숙이와 도이 덕분에 내가 그나마 견뎌 낼 수 있었다. -117쪽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설득하느라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거래.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만 살아 계시는데 이제야 허락하셨댄다.”
엄마는 가슴을 치며 꺼이꺼이 울었다. 나도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쏟아냈다. -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