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사는 동안 자주 넘어지고 울었다. 때로는 불나방처럼 불을 향해 무모하게 날아오르기도 했고, 그렇게 죽고 싶어서 날갯짓을 했다. 술에 취하면 불안하다고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안은 태어날 때부터 몸속 어딘가에 달려 있는 내 일부분 같았다. 어째서 불안은 날 떠나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사진에 그 불안을 조금씩 몰래 심어 놓았다. 나만 알 수 있게, 또는 누군가가 눈치채 주기를 바라며. 슬픔은 온전히 내 것이지만 너의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프롤로그〉 중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아이가 아닌 나이가 되면 겁도 많아지고 순간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걸까요? 이토록 멋진 바다를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우리도 분명 저럴 때가 있었는데. 십 년 이십 년이 흐르고 저 아이들도 나이가 들면 지금의 우리처럼 멀찍이 서서 바라만 보고 있을까요?
—〈아이들은 겁이 없어요〉 중에서
어떻게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왔지,
하고 생각해 봐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손을 내밀어 준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의 절망감으로 영원히 도망쳤을까?
—〈밥〉 중에서
방금 ‘영원’을 약속해 놓고
뒤돌아 ‘이별’을 생각한다.
—〈마음〉
셔터를 누르며, 아득하기만 한 풍경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눈 위를 걷는다. 걸으면 걸을수록 세상은 하얗게 사라져 간다. 고개를 돌려 봐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누구든 상관없다. 저 사라져 가는 세상에 누군가가 존재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눈〉 중에서
단 한순간도 온전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잠시 동안의 안정은 또 다른 이름이 비집고 들어와 공간을 채운다. 불안, 외로움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그래서 나는 그 자리가 다른 뭔가로 채워졌으면 하는 마음에 누군가를 찾거나 일에 몰두하는가 보다.
—〈그 자리〉
앞으로 그리울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아질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울 사람이 될까?
—〈그리울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 중에서
이왕 한 번 사는 삶, 웃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누구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또한 미움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덜 아팠으면 좋겠다. 숨 쉬는 일보다 손을 잡고 걷거나 햇빛에 춤추는 그림자를 지켜보고, 집 건너편 감나무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전하게 눈을 뜨는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태어난 김에〉 중에서
분명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서로를 설득시키기 위한 노력이었고, 우리는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멀어졌다.
—〈서로의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