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결국 이렇게 되리라고 오래전부터 예감한 일을 했다. 집에 가서 책을 읽은 것이다.
—본문 중에서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탐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서문이나 관련 논문, 다큐멘터리, 작가 인터뷰 등을 통해 그런 갈증을 해소할 수 있고, 작가 자신이 해설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기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책과 작가가 속한 출판 세계나 그 뒷이야기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수많은 작품과 작가에 비하면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태껏 살면서 수없이 봐 온 책들이었다. 부모님의 책장에서, 고등학교 때 영어부 벽장에서, 내가 다닌 모든 서점과 도서관에서. 그리고 친구들의 손에도 당연히 들려 있었다. 나는 읽어 본 적이 없는데, 처음에는 어쩌다 보니 기회가 없었고, 나중에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현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들을 나는 이제야 알아보았다. 《호밀밭의 파수꾼》 《프래니와 주이》 《아홉 가지 이야기》.
샐린저. 여기가 J. D. 샐린저의 에이전시구나.
—본문 중에서
출판 세계나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전혀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왜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어쩌면 에이전시나 출판사에서 작품의 보안을 위해 공개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품 속 세계관을 지키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많겠지만 은둔 작가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 D. 샐린저가 속한 에이전시라면 그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쳐야 했을 것이다.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의 은둔 생활에 대한 비밀은 어느 정도 밝혀졌지만, 《마이 샐린저 이어》는 작가의 꿈을 안고 뉴욕에 와서 문학 에이전시에 취직한 사회 초년생 조애나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샐린저의 목소리는 물론 출판 세계의 뒷이야기까지 생생하게 담아냈다. 패션 세계의 뒷이야기를 다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문학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편지 끝에 내 서명을 하며 행복감에 가슴이 뛰었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 ‘샐린저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고급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선을 넘은 것도 사실이었다. 마음이 끌리는 호기심이나 공감 어린 개입 혹은 단순한 동정심과 지나친 관여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나는 왜 이 편지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할까? 우편 요금 계량기로 걸어가면서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모든 팬에게 똑같이 표준 문안만 보내면 되는데, 왜 그게 안 되지? 답은 간단했다. 나는 팬레터를 사랑한 것이다. 그 편지들은 흥미진진했다. 가령 금요일 아침 책상에 혼자 앉아 읽고 있으면 분노와 애정, 경멸과 공감, 존경과 혐오가 뒤섞인 이상한 힘이 불끈 솟아오르곤 했다.
—본문 중에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에 오른 《호밀밭의 파수꾼》을 뒤로하고 잠적해 버린 샐린저의 은둔 생활은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고, 에이전시로 독자들의 팬레터가 쏟아졌다. 이 팬레터에 에이전시가 정해 놓은 답장을 보내는 것도 조애나의 일이었다. 에이전시 입장에서 샐린저의 팬레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은 형식의 답장을 통해 예의만 표시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조애나는 팬레터를 하나씩 읽기 시작했고, 조금씩 흥미를 느끼며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든다.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든 출판 세계에 조금씩 익숙해지며 잊어버린 바로 그 감정. 뉴욕에 온 이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되찾은 것이다.
마침내 해가 쨍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에이전시의 어둠이 약간 답답하게, 심지어 우울하게 느껴졌다. 나는 봄이 왔어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수녀처럼 수수한 검은색 시프트 원피스를 입은 루시와 헐렁한 갈색 정장을 입은 보스에게, 우리의 발소리를 죽여 주는 진초록색 카펫과 각 방의 진갈색 책장에도. 겨울에는 아늑한 피난처 역할을 해 준 어둠이건만, 이제 나는 따스한 햇볕에 맨팔을 드러낸 채 산책하고 싶은 마음에 점심까지 남은 시간만 계산하고 있었다. “원피스가 예쁘네요.” 루시가 자기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나를 보며 말했다. “복고풍이에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다가왔다.
—본문 중에서
아직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기 전의 고풍스러운 모습이야말로 《마이 샐린저 이어》가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다. 60년대식 셀렉트릭 타자기와 딕터폰(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필요할 때 재생하여 듣는 기계), 등장인물의 옷차림과 에이전시 사무실, 카페, 레스토랑의 정경은 레트로와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책을 읽는 동안 90년대 뉴욕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브루클린, 퀸스, 로어이스트사이드 등지에 어슴푸레 새벽빛이 밝아 오면, 나 같은 사람 수백수천 명이 신경 써서 옷을 차려입고 원고 뭉치 때문에 축 늘어진 큼직한 토트백을 어깨에 멘 채 아파트를 나섰다.
우리는 연하고 달달한 커피와 데니시 페이스트리를 주문하기 위해 폴란드 빵집, 그리스식 델리, 모퉁이 식당에 줄을 섰고, 기다리는 동안 원고를 읽었다. 그런 다음 지하철에 몸을 싣고 미드타운, 소호, 유니언스퀘어의 사무실로 향했다. 제발 앉을 자리가 있어서 출근 전에 원고를 조금 더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본문 중에서
처음 《마이 샐린저 이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샐린저에 대한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노라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조애나를 보며 그 시기의 경험과 고민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또한 《마이 샐린저 이어》는 그저 꿈을 찾아가는 낭만적인 이야기만 하진 않는다. 이른 아침 출근과 늦은 저녁 퇴근 풍경, 반복되는 고된 업무, 월급, 점심값, 월세 그리고 연애까지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어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에이전시의 역사와 보스 마거릿과의 대화를 통해 변해 가는 세상을 직시하며 독립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서술한다. 《마이 샐린저 이어》를 읽는 동안 조애나의 성장과 함께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동안 잊었던 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