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로센블루스 박사와 나를 둘러싼 일단의 과학자들은 기계 안에 서든 생체 조직 안에서든 커뮤니케이션 주변의 문제와 통계역학이 근본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문헌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공통된 용어는커녕 이 분야를 이르는 단일한 이름조차 없어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깊이 숙고한 끝에 우리는 기존 용어가 모두 너무 한쪽으로 크게 편향되어서 그. 분야가 응당 누려야 할 미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과학자가 곧잘 그러듯이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하나 이상의 그리스어 신조어를 지어내야 했다. 우리는 기계와 동물 모두를 대상으로 포괄하는 제어와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전체 분야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_60~61쪽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과학에 공헌한 우리는 도덕적 견지에서는 적어도 편안하지만은 않은 입장에 처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선악과 무관하게 기술적으로 대단한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학문의 창시에 공헌해 왔다. 우리는 새 학문을 세상에 건네줄 수 있을 뿐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벨젠과 히로시마의 세상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기술적 진보를 억제할 권리가 없다. 진보는 시대의 소유다. 우리가 진보를 억제한다고 해도 이 기술의 발전을 가장 무책임하고 욕심 많은 기술자들의 손에 넘기는 결과만 생길 것이다.
_80쪽
현대의 자동 기계는 생명체로서 베르그손의 시간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베르그손의 고찰에 따르면 생명체 기능의 근본 양식이 이러한 유형의 자동 기계의 기능의 본질적인 양식과 같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계론조차 생기론의 시간 구조에 부합한다고 할 정도로 생기론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도덕이나 종교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관점을 취한다면 이 새로운 역학은 과거의 역학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기계론적이므로,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승리는 완전한 패배이기도 하다.
_99쪽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논리는 인간의 마음―따라서 인간의 신경계―에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느 것도 포함할 수 없다. 인간이 논리적 사고라고 하는 활동을 하는 한 모든 논리는 인간 마음의 한계에 따라 제한된다.
_215쪽
전쟁에서 이기는 기계를 프로그래밍하려면 이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학습 기계는 경험에 따라서 프로그래밍되어야 한다. 파멸로 직접 이어지지 않은 핵전쟁 경험은 전쟁 게임의 경험뿐이다. 우리가 실제로 위험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할 방법의 길잡이로서 이 게임의 경험을 사용하려 한다면 전쟁 게임을 프로그래밍할 때 쓰이는 승리의 평가와 실제의 전쟁 때 우리가 느끼는 승리의 평가가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즉각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편견과 감정적인 타협이 눈을 가려 우리가 파괴를 승리로 부르는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계는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승리를 바라면서 승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유령이 문을 노크하는 사태에 이르고 말 것이다.
_281~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