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21
철학자의 관심은 말과 표현이 아니라 생각과 사유를 향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철학자도 말을 잘할 수는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철학자를 철학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외적인 말이 아니라 내적 사유다. 이 대목에서, 철학하는 자는 ‘내면’을 향하고, 말 잘하는 자는 ‘외면’에 신경 쓴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서양철학의 주류가 공유해 온 주된 특징 중 하나는 특유의 정신주의적 경향, 즉 ‘외적, 감성적인 것에 대한 내적, 정신적인 것의 우위’다. 나는 이 원칙적인 우위에 의거하여 철학자는 외적인 말만 잘하는 자일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 말은 내적 사유의 결과다.
p. 83
과학자도 ‘왜?’라고 묻고 철학자도 ‘왜?’라고 묻지만 두 물음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학자의 ‘왜?’가 특정 전제 위에서의 ‘왜?’라면, 철학자의 ‘왜?’는 아무런 전제도 없는 상태, 그야말로 세계의 끝에 이를 때까지 던져지는 ‘왜?’다. 이렇게 보면 ‘왜?’에 대한 숲속의 실증주의자의 답은 그 자체 완결된 것이 결코 아니다.
p. 116
철학자는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과연 어떤 죽음이 철학적인 것일까?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던 그날 하루에 대한 온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 앞에 찾아온 죽음을 담담히 그리고 “숙연히”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의 혼과 부르르 “떨며” “차가워지고 굳어 가던” 그의 신체의 최후를 보게 된다. 이 끝 이후 저 세상에서 소크라테스의 영혼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우리는 모르고, 그건 『파이돈』의 저자도 모른다. 플라톤이 이 책에 적어 둔 것, 우리가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학했던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하루의 ‘삶’이다.
p. 169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형이상학이 세계의 외부에 대해 세우는 모든 학설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고” 이에 대해서는 “어떤 경험의 시금석도 승인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학설의 참을 증명하기는커녕 참, 거짓 여부조차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험 저편에 대해서는 경험의 기준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이상학자들은 ‘신은 존재한다’고 말하고 다른 형이상학자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험의 기준을 갖지 못한 우리는 도대체 누가 참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를 판단할 수도 없다. 그들은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것(신)에 대해 경험적으로는 ‘증명되지도 않고 논박되지도 않는’ 내용(존재 또는 부재)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p 216
아테네의 무지한 시민들에게 끝없는 물음을 던지며 그들을 무지의 지로 인도하려던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들이 건네는 독배를 받아야 했던 것처럼, 어둠을 밝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죄수들에게 진짜 밝음을 보여 주어 어둠을 어둠으로 깨닫게 해 주려던 철학자 또한 그가 깨우치려던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p 249
물론 우리는 이 신 자체에 대해 사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 자체는 모든 인간적 경험 및 사유 가능성을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도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이 관계 안에 서 있고 우리 스스로가 그 두 관계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창조한 신’과 ‘신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관계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신앙 또는 불신이다. 그러므로 신의 문제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첫 번째 물음은 ‘나는 신을 믿어야 하는가?’이다. 이렇게 해서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신에 대한 나의 믿음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따라 나는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을 창조한 신, 자신을 믿는 피조물에게는 내세와 구원을 약속하고 자신을 믿지 않는 피조물에게는 심판과 형벌을 준비한 신, 당신은 그 신을 믿을 것인가?
p 296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각과 정신’ 또는 ‘경험과 이성’을 인식의 필수불가결한 두 원천으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던 근대의 철학사는 놀랍게도 이 같은 상식의 기대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인식론의 전통이 있었는데, 이 둘은 모두 감각과 정신 중 하나만을 인식의 타당한 원천으로 인정하는 매우 극단적인 방향으로 내달았다. 인식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한 전통은 ‘감각 경험’이라고 답하고 다른 전통은 ‘이성의 사유’라고 답한다.
p 350
지금부터 여러분과 나는 한시적인 경험론자다. 나는 경험론자로서 쓸 것이고 여러분은 경험론
자로서 읽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인식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모든 물음에 ‘인식의 유일하게 타당한 원천은 경험’이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답해야 하고, 감각 경험에 근거를 두지 않은 어떤 인식론적 주장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이 약속만 지킨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근대 영국의 경험론적 철학자들의 사유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p. 356
태어날 때 인간의 마음은 백지다. 아무런 글씨도 쓰여져 있지 않다. 여기에 어떤 글씨가 쓰여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경험뿐이다.
p. 451
철학은 사유함이고 사유란 ‘혼의 눈으로 봄’이다. 이 점에서 철학은 사실과학이 아니고 철학자는 사실의 넝마주이가 아니다. 니체는 “나는 기억을 담아 두는 통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통 안에 보관된 기억의 양으로 치자면야 박식한 사실과학자를 따라갈 수 없고 넉넉한 용량의 인공지능을 당해 낼 도리가 없다. 그러나 철학은 사실과 지식의 양이 아니라 오직 사유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학문적 지성과 인공적 지능을 능가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그물의 제작자에 비유된다. 세계 인식은 어부가 제공해 준다. 철학은 어부에게 고기 잡는 그물을 만들어 준다. 어부의 육의 눈은 그물 안에 걸려든 생선만 보지만 그물 제작자의 혼의 눈은 ‘눈에 보이는 생선들 간의 보이지 않는 관계의 망(網)’을 본다. 사유의 눈이 본 이 관계의 망이 철학자가 어부에게 건네주는 그물(網)의 설계도다. 그러므로 어떤 그물도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철학적 그물에는 이유가 있다. 그물은 혼의 눈으로 봄, 사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